04. S11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호텔로 들어와 본 것이 처음인 은찬은 호텔 뒤쪽에 경관 좋은 별관이란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직원이 안내해 주지 않았다면 필시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직원이 VIP용 빌라라고 칭하는 의문의 'S11호‘는 숲 속에 있었다. 직원이 벨을 누르자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한 번 더 눌렀고,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이 열렸다. 불쑥 맨가슴이 튀어나와 은찬은 움찔 놀랐다. 하지만 여직원은 익숙한 듯 말했다.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은찬은 도무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패션, 죽이네.”
그런가? 은찬이 어리둥절해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걸레표냐, 넝마표냐?”
이런 씨이!
“들어와.”
남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은찬은 가슴이 답답했다. 첫마디에 벌써 질려 돌아가고 싶었다. 날치기와 안면이 있고, 조금은 고의로 놓아준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말하는 투로 봐서 아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인 것 같으니까. 어쩌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불안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속인 데다 사례금까지 챙기겠다고 온 게 양심에 찔린다.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쑥스럽다. 남자의 벗은 웃통 같은거 도장에서 심심찮게 봐왔는데 어째서 갑자기 민망한 건지 알수가 없다.
“들어가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남자가 외쳤다.
“어이, 나 커피.”
“알겠습니다.”
직원이 대답하고 문을 닫았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거 같은 생각에 은찬은 몰래 다시 문을 열었다. 10cm쯤 열어놓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키가 좀 크긴 해도 저런 남자 하나쯤은 가뿐히 이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조심스러웠다. 옥탑방이 통째로 들어가도 나을 것 같은 거실이다. 엄청 넓구나. 이 아저씨 어디 있나. 카펫, 커튼, 소파, 테이블, 장식장, 조명등,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눈이 어지럽다.
“어떻게 왔어?”
어떻게 왔느냐니?
“지하철 타고 왔는데요.”
남자가 픽 웃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재수 없게 비웃을 수 있는지.
“요즘 애들은 배짱이 좋은 건지.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배달이나 할 것이지 왜 끼어들었을까? 지가 무슨 태권브이인 줄 착각한 건가? 용감한 시민상 타려고? 아니면 오지랖이 궁상스럽게 넓어서 안 끼어들고는 못 배기겠어서? 돈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 보면 투철한 시민 정신 어쩌고는 좀 그렇다. 그렇지? 앉아라, 아그야.”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다. 죽어라고 오기 싫더니. 염병할. 꼭 제비같이 생긴 인간이 말도 어쩜 저렇게 재수 없게 할까. 옆으로 쫙 찢어진 눈은 마시마로를 닮았고, 콧날은 높고 곧아서 삼각자를 세워놓은 것 같고, 입술은 확 뒤집어져서 안젤리나 졸리 같다. 선탠이라도 했는지 피부색은 앞뒤로 잘 구운 생선....아! 꽁치구이 먹고 싶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느끼하고 짜증나게 생긴 얼굴이다. 키는 180cm쯤 되려나.
“씩씩거리지 말고 앉아.”
은찬은 움직이는 남자를 째려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남자의 허리 아래가 수건 한 장 뿐일 걸 알고 나서부터 열도 나고 화도 나고 엉망징창이다. 어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탁자 위에이Td는 보랏빛 꽃만 노려 보았다.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고삐리지?”
뭐? 어처구니없어서 홱 고개를 들었지만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몇 학년이야? 땡땡이쳤냐? 아니면 퇴학당했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유리 너머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불투명 유리로 남자의 엉덩이 라인이 비쳐 보였다. 헉! 근데 색깔이 살색이다!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팬티를 갈아입다니! 도대체 저 인간은 어떤 생각을 가진 거야! 은찬은 벌게진 얼굴을 홱 돌리며 외치듯 대꾸했다.
“아뇨!”
“아니라니? 어느 쪽이 아닌데?”
“고삐리요!”
“설마 그럼 중딩?”
"아뇨! 저. 스물넷입니다!“
“야. 인마. 여기 누구 귀먹은 사람 있냐? 자식.소리는.”
그래도 벌거벗은 웃통은 뭔가. 입으려면 다 입고 나올 것이지 청바지만.그것도 골반이 다 보이도록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나오는 건 무슨 얼어 죽을 패션이란 말인가!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남자가 말했다.
“좋을 때다. 그땐 한 살이라도 올려서 어른 대접 받고 싶지.”
남자는 방문 앞에 서서 시계를 차고 있었다. 바지 다음에 시계라니, 그 인간 옷입는 순서 한번 특이하네.
“야식 배달 전문이면 낮엔 뭐 하냐?”
“알 거 없잖아요.”
“그 자식 되게 빡빡하게 구네.”
“근데 아저씨, 왜 계속 반말입니까?”
“뭐, 아저씨?”
“저보다 늙으신 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무작정 반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말 낮춰도 되겠는냐, 이렇게 미리 양해를 구하는게 기본 예의 아닙니까?”
“그러는 입은 참 예의도 있네. 어이, 근로 청년. 말까도 되겠냐? 됐지?”
“벌써 깠으면서....”
“도망간 놈은 몇 살이냐?”
“스물이오.”
은찬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모, 몰라요. 제가 그걸 어떻게....”
수습하려 해도 뒤늦은 걸 남자의 표정으로 알았다. 비웃는 꼬락서니가 독립투사 고문하는 일본 순사 같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 못한다. 내 소원은 첫째도 대한 독립이요, 둘째도 대한 독립, 셋째도 대한 독립..... 그랬어야 했는데, 핏대 세워 지킬 거룩한 명분은 아니어도 절대 말해선 안되는 것이었는데.....빌어먹을! 되는게 하나도 없네! 그래도 어떻게 덮어보자 싶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스무 살쯤 돼 보였다고요.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워낙 사람 보는 눈이 있고......”
“귀신을 속여라. 하려면 좀 잘 하든지. 어설픈 놈. 생긴 건 꼭 계집애같이 생겨가지고 하는 짓은 왜 그러냐?”
순간 욱하고 올라왔다. 계집애같이 생겼단 말, 귀에 딱지 앉도록 들어왔는데 그 말이 너무 화가 났다. 왜냐하면, 왜냐하면......내가 계집애니까. 평소에는 전혀 인식하지 않고 , 때때로 자신조차 헛갈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자긴 하다고. 근데 이 인간은 절대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한 표정이잖아. 의심조차 안 하는 모양이네. 쳇. 여자로 본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새삼 그렇게 보이고 싶을 것도 없지만.....그래, 아저씨 맘대로 생각해.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여자라고 밝히면 어떤 표정을 할지, 무슨 말을 할지 무지 궁금하지만 내가 싫어. 전혀 여자로 안 보는데, 물어보지도 않는데 ‘나 여잔데요’ 자백하는 거 구차하잖아. 열라 구차해.
“혹시 그 경찰까지 한패냐? 니들 경찰 따까리 같은 거 아냐? 아니면 앵벌이 뭐 그런 거든가. 아니라고 해도 믿을 건 아니지만.”
순간 은찬이 벌떡 일어났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망할 인간이 정말! 사포로 혓바닥을 확 문질러 버릴라! 너무 화가 나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사례금이고 뭐고 도망가는 게 장땡일 것 같았다. 그때 그 일이 발생했따. 휙 지나가려던 은찬의 어깨가 물을 마시고 있던 남자의 컵을 친 것이다.
“어엇”
입으로 들어가야 할 물이 남자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
은찬은 얼떨결에 손을 뻗었다. 정확한 의도는 남자의 가슴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닦아보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남자의 가슴에 대고 물을 닦아내려 했다. 그런데 손바닥에 피부의 감촉을 느낀 순간에야 이상한 자세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가 놀라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은찬도 굳어버렸다. 그때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어머, 세상에!”
남자의 가슴에 손을 댄 채 은찬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엔 못 볼 것 봤다는 표정의 여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서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나, 남자끼리!”
후줄근항 청바지와 후드 점퍼에 커다란 야구 모자를 쓰고 왔을 땐 껄렁한 양아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걸 보니 나름 번듯하다. 고은찬, 나이는 스물넷 이라고 주장하지만 기껏해야 스물 한둘 정도 됏을 것이다. 고용계약서에 적은 주민등록번호도 보나마나 가짜일 게 분명하다. 저런 놈들이야 뻔하지. 인생이 다 뻥이고 사기고 장난이지. 175cm 이상은 안 될 거 같은 키에 골격은 가는 편. 피부가 희고 눈은 크고 동그란데다가 입술의 색소가 유난히 붉다. 어디선가 본 아이돌 그룹의 리더싱어를 닮았다. 요즘엔 얼핏 보면 여자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한 남자들이 인기다. 고은찬도 그 부류다. 입 다물고 가만있으니 분위기가 묘하다. 인물이 아깝다. 딕이 보면 침을 질질 흘리겠군. 한결은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오는 은찬을 주시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느끼도록 일부러 더 뚫어지게 은찬을 보았다. 드디어 여자가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에 앉는 은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는 분이세요?”
“그런 거 같네요.”
“그럼 가서 인사하고 오세요. 전 괜찮으니까요.”
어디서 저런 구닥다리 양복을 구했을까? 자식, 입으려면 좀 몸에 맞는 걸 입지.
“지금 생각 중입니다. 아는 척을 할까 말까.”
“왜요?”
쪽 팔려서, 7080콘서트도 아니고 저 넓적한 넥타이는 뭐야?
“좀 껄끄러운 일이 있었거든요.”
계집애가 호들갑을 떨면서 게이니 어쩌고 하진 않았으면 고은찬은 당장 경찰서 감이었다. 어머니에게 혼나고도 호텔을 들락거리며 귀찮게 하던 계집애가 고은찬과 같이 있는 걸 보고 질겁했다. 눈 버렸다는 표정으로 도망가는 여자를 보고 한결의 머릿속에 형광등이 번쩍했다. 결혼을 하라고? 어디 시킬 수 있으면 해보시지. 고은찬에게 제의를 했다. 아르바이트해 볼 생각 없냐고. 그런데 고은찬은 날치기랑 한패인 게 다 들통이 났는데도 뻔뻔하게 선불을 요구했다. 그거도 사례금의 배를 달라고. 이제 와 말이지만 뭘 믿고 준다고 해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경찰에 잡하넣지 않는 조건으로도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었는데.
“저런 타입 어떻습니까? 요즘 예쁜 남자가 인기라던데?”
“전 그다지.”
오늘 맞선을 보고 있는 여잔 내숭을 떠느라 말을 지나치게 아끼고 있다. 지루해 하품이 나올 것 같다. 그때 웨이터가 은찬의 테이블로 다가서는 게 보였다. 입 모양을 봐서 알 수 있었다. B코스로.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한결이 섣루러 다가갔지만 웨이터는 이미 주문을 받고 떠난 상태였다.
“야, 고은찬. 여기서 만나는구나!”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표정에는 화가 난 채로 은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시야에는 은찬의 정면과 한결의 옆모습이 보였다.
“하필이면 제일 바쁜 금요일 대낮에 서을 볼 게 뭡니까? 오후 수업도 꽉 찼구먼. 아저씨 백수예요?”
“시끄러, 인마. 너, 누가 주문하랬어?”
한결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힐난했다.
“그럼 이런 데 와서 물 잔만 빨고 있어요? 이상하게 생각할거 아니에요.”
“네가 계산해, 인마.”
“나 차비밖에 없는데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너한테 줄 거 이미 현찰로 계산 끝냈잖아. 민증은 갖고 왔냐?”
“부, 분실했다 그랬잖아요. 재발급 신청했는데 아, 아직.....”
“휴대폰에 사진 박아놨으니까 딴 짓할 생각은 아예 안하는게 좋을 거다. 여차하면 경찰서 담벼락을 네 몽타주로 도배해버릴 거니까.”
“몽타주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사람이 좀 믿고 모든걸 똑바로 생각해야지. 사람이 왜 그렇게 삐딱해요?”
“뭐, 인마!”
“내가 무슨 범죄자냐고요.”
“그러니까 잘하란 말이야 자식아. 근데 이 양복은 뭐야? 아버지 거냐?”
“양복 입으라면서요.”
“양복도 한 벌 없어? 아, 됐고. 1단계로 가자.”
“벌써요?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나도 안 먹었어, 인마.”
“그러니까 우선 밥부터 먹고....”
말을 하다 멈춘 은찬의 시선이 여자 쪽으로 향했다. 한결은 돌아보지 않고 끔벅거리는 은찬의 눈만 보았다.
“왜?”
“저 여자 그 여자네요? 사진.”
“사진?”
“지난번에 전화번호 적어준 종이....아! 그거 내가 안 드렸던가?”
“손 올려봐.”
“꼭 이렇게 해야 돼요?”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은찬이 팔을 올렸다. 한결은 테이블 위로 올라온 은찬의 팔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마치 다정한 연인이 그렇듯이.
“웃어. 인마.”
“지금 이게 웃고 있는 거거든요. 아저씨”
한결은 피식 웃었다.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어 거리를 좁히자 은찬의 일그러진 미소가 더 찌그러졌다.
“아저씨 변태죠?”
“까불래?”
“이게 정말 효과가 있다고 보십니까?”
“너도 봤잖아. 저번에 그 여자.”
“예쁘던데...”
“왜, 관심있어?”
“삐딱이 아저씨가 찰 이유가 없어 보이던데. 차였으면 차였지.”
“너 맞을래?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아뇨, 삐딱한 변태로 보여요.”
“이 자식이!”
“쉬!”
“너 나중에 봐. 자. 시간 됐다.. 20분 뒤에 2단계로 간다.”
일어서기 전에 한결은 손을 뻗어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멈칫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한결은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쌓인 얘기가 좀 있어서.”
여자는 이미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리스트중에 첫 번째인 여자, 좋은 집안에 똑똑하고 예쁜 여자라는 얘기다. 그래서 어떤 기부이냐면 우유를 부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흰 건반, 검은 건반, 그 반듯한 질서를 깨고 싶었듯이....
“식사부터 하시죠.”
한결은 물 잔으로 손을 뻗다가 이상한 걸 느꼈다. 손가락에 좀 전의 감촉이 살아나 찌릿찌릿한 것이다. 녀석의 새까만 머리가. 머릿결이 가늘고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보다. 멧돼지 털도 새끼땐 부드러우니까. 그런데 왜 쓰다듬었지? 아, 설정이었어. 그래. 보다 효과적인 설정. 우적우적 잘도 먹는다. 음식이 나오기가 무섭게 쓱쓱 잘도 비운다. 그야말로 멧돼지 급 식욕이다. 게다가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혼자 밥 먹으면서 저렇게 히죽대는 녀석은 처음 본다. 아이스크림과 타르트를 들고 온 웨이터에게 간 이라도 빼줄 듯이 환하게 웃는다. 혀가 녹을 정도로 단 걸 덥석덥석 먹더니 손가락까지 쪽쪽 빤다. 덕분에 이쪽의 식사가 더 지루하다. 여자는 제 주먹보다 훨씬 작은 스테이크를 2퍼센트씩 잘라 먹는다. 애초에 다져달라고 할 것이지.
“워싱턴 대학에서 비즈니스 스쿨을 마치셨다고요?”
이 여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무튼. 여자의 직감이 의심으로 솟나보다. 갑자기 학력을 따지고 들기 시작하는 걸 보니.
“거기에 들어간 기억은 있는데 마친 기억은 없습니다.”
“네?”
“거기가 공부만 하기에는 경치가 워낙 좋거든요.”
“시애틀이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란 얘기는 들었어요.”
“은둔하기 좋죠. 자살하기도 좋고. 눈뜨면 비, 아니면 안개라서 멀쩡히 걷다가도 전봇대에 머리 박고 감전이라도 됐으면 싶거든요.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위장에다 한 번에 16온스씩. 주 평균 40회 채워 넣으면 되거든요.”
“뭘 채워 넣어요?”
“커피.”
대답한 한결의 손을 들어 웨이티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여자는 아직 3분의 1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나 상관 말고 천천히 드세요. 음식 남기는 거 안 좋아하죠? 그럴 거 같았어요. 좋은 습관입니다.”
접시를 치우려던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나이프로 고기를 찔러댔다. 20분이 다 되었지만 녀석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결은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은찬에게 눈짓으로 채근했다. 하지만 녀석은 기어이 접시를 깨끗이 핥고서야 행동응 개시했다. 물 잔 쓰러뜨리기다.
“어엇!”
물이 은찬의 무릎을 적시고 잔은 바닥으로 떨어져 퍽 깨졌다. 은찬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한결이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결은 다가오느 웨이터에게서 수건을 홱 뺏어 들고 은찬의 허벅지를 닦았다.
“괜찮아?”
놀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한결을 내려다보는 은찬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하는 표정이었다. 한결은 두 눈에 힘을 주고서 은찬에게 제대로 연기할 것을 강요했다.
“저, 저리 꺼져. 이제 나한테 신경 쓸 것 없잖아. 우, 우린 다 끝났어! 나쁜 놈!”
은찬이 거칠게 한결의 어깨를 팍 밀쳤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 힘이 실린 가격이었다. 윽! 한결은 신음이 나오는걸 꾹 참았다. 저, 자식이! 부아가 치밀었지만 마직막 연기에 혼신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쌤통이란 표정으로 돌아서 가는 빌어먹을 녀석을 애절히 부르는 것이었다.
“차, 찬아!”
한숨을 쉬고 제자리로 돌아온 한결을 맞은건 충격과 의혹에 휩싸인 여자의 쌀쌀맞은 눈초리였다. 이제 남은 건 극적인 엔딩. 한결은 자숙의 표정으로 고해하듯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게이에 대해서.”
학생들의 봄 방학이 끝나 오전 수련이 비었지만 달가운 건 아니다. 도장에 등록하는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점심에 카레 해먹을까?”
이렇게 말해도. 아마 완성은 저녁때쯤이겠지.
은찬은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는 엄마를 잠깐 보고 볼펜을 굴렸다. 깨알같이 글자를 써 붙여놓은 볼펜이 데구루루 굴렀다. 볼펜은 삼겹살을 가리켰다.
“엄마, 삼겹살이라는데?”
은찬은 볼펜을 들고 엄마에게로 쫓아갔다.
“이그!”
국자 찍기 작렬.
“아야!”
“가서 감자나 사와!”
고기를 못 먹은 지 어언 8일째. 소라도 되고 싶다. 되새김질이라도 하게. 그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스테이크가 아른거린다. 그 이후 두 탕이나 뛰었건만 왕재수 짠돌이가 주수만 먹으라고 윽박질러서 고기는 구경도 못했다. 도대체 이 괴상한 아르바이트는 언제쯤 끝나려나. 덕분에 동옥 아줌마 반지는 해결했지만 연재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생활비가 모자라서 고깃간 구씨 아저씨한테 돈을 좀 꾸었기 때문이다.
“야, 고은찬.”
빚쟁이 구씨 아저씨다.
“어머니 계시냐?”
“네. 왜요?”
“아, 이거 좀 드리려고.”
“그게 뭔데요?”
계다을 내려온 은찬은 좁은 입구에서 구씨 아저씨와 마주쳤다.
“이거? 호두 기름. 시골 큰댁에서 보내왔는데 이게 감기에 좋거든. 어머니 감기 걸리셨다면서?”
“다 나았는데.”
“그, 그래도 먹어두면 좋아.”
“그래요? 고마워요. 잘 먹겠습니다.”
“아, 아니. 내가 갖다놓지 뭐. 너 나가는 길 아냐?”
“괜찮아요. 제가....”
“내가 간다니까! 어, 어서 가봐”
아저씨는 기름병을 뺏기기라도 할까 봐 꽉 쥐고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섰다. 은찬은 벙벙해져 서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여기 학교인데요. 은새 담임입니다.]
“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은찬은 깜짝 놀라 부동자세로 90도 인사를 꾸벅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학교가 경찰서도 아닌데...
[은새 오빠 되죠?]
“네? 오빠요?”
[생활 기록부에 오빠라고 되어 있는데.]
헉! 이것이 공문서에까지 장난질을. 쯧!
[집에 전화를 했더니 결번이라던데. 전화번호 바뀌었나요?]
“안 바뀌었는데요. 몇 번으로 거셨는지....”
느닷없이 걸려온 선생님의 전화는 어머니가 학교에 좀 와줬으면 하는 거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쭈었더니 예상대로 은새가 또 사고를 쳤단다. 아이들이랑 명품계를 조직했다나. 거기까지였으면 선생님까지 알 도리가 없었을 텐데. 얘가 겟돈을 횡령해다는 제보다 들어왔다는 것이다. 횡령이라니?
“내가 이 화상 잡기만 해봐. 망할 년! 아우, 씨이!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평생 태클이야! 정말 미치고 팔딱 뛰겠네! 고은새. 이걸 어떻게 확 작살을 내지! 잡히기만 해봐! 날계란으로 얼굴을 확 문대버릴 거니까!”
그길로 은찬은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PC방을 뒤지고 공원을 수색하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고은새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구근 분은 분대로 치솟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도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 반짝거리는 상자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이게 뭐야?”
“언니들이 막 와가지고 놓고 갔어요. 맘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자꾸 들어와서. 씨이.”
승경의 잔소리를 들으며 포장을 뜯어봣다. 편지에 초콜릿, 편지에 초콜리, 편지에 초콜릿. 그냥 초콜릿.........
“누가 놓고 간 거라고?”
“어닌들이오. 전기 동문여고 교복을 입은 언니들, 사범님 후배래요.”
“걔들이 언제 왔다 갔지? 수업 중 아닌가?”
“몰라요. 되게 못생기고 뚱뚱하고, 공부도 열라 못하게 생겼어요.”
“근데 오늘 무슨 날이니? 내 생일인가?”
“발렌타인데이잖아요. 사범님은 그런 것도 몰라요.”
“아하....얘들아. 수련 시간 됐다. 모여! 집합!”
“야아아아!”
“차렷! 국기에 대한 경례!”
점심을 굶고 여이은 수련에 기진매진해 버렸다. 틈틈이 먹은 초콜릿 때문에 혀바닥이 아렷다. 마지막 수련을 마치고 나니 눈앞이 노랗다. 입은 단데 위에 쓰리고, 은새 걱정에 머리도 아팠다. 우유 한 잔 겨우 마시고 샤워도 못한 채 도복을 갈아입었다. 은새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애 어디 쳐박혀 있는 거야! 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도장을 나오는데 꽃과 선물을 든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선배님!”
“사범님! 우리 왔어요.”
도장을 거쳐간 아이들도 있고, 학교 후배들도 있었다. 지쳐반길 히도 없던 은찬은 번뜩 생각나는 게 있어 아이들을 붙들고 물었다.
“야, 니들 은새 못 봤냐?”
“은새? 은새가 누구예요?”
“선배님 동생이잖아. 우리학교 3학년.”
“그래 맞아. 혹시 못봤어?”
“못 봤는데요?”
“오늘 발렌타인데이니까 남자 친구 만나러 갔겠죠. 뭐.”
남자 친구? 설마 그 까마귀 양아치?
“선배님. 우리 같이 저녁 먹어요.”
“저희가 삼겹살 사드릴게요.”
“어? 사, 삼겹살? 아, 안돼. 미,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바쁘거든.”
으. 삼겹살. 이놈의 고은새가 웬수다 .웬수!
“아이. 사범님. 오늘 발렌타인데이란 말예요. 같이 노래방가요.”
피눈물을 삼키며 조르는 아이들을 밀어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은새가 아닌가 싶어 얼른 전화를 받아TEk.
"여보세요?“
상대가 말이 없었다. 다급해진 은찬은 전화기를 바짝 대고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은새지? 야, 고은새!”
[아우, 이 자식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은새가 아니다.
[고막 터질 뻔했잖아. 자식아!]
“아...왜요?”
[왜라니. 내가 너한테 볼일이 한 가지밖에 더 있어? 지금 빨리 튀어 와. 강남대 앞에 있는 조슈아 알지?]
“지금 좀 바쁜데, 다음에 가면 안 되겠습니까? 급한 일이 좀 생겨서요.”
[뭐? 이 자식이 따고 배짱이네. 내가 자선 사업가로 보여? 돈 받았으면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몇 번 시킨 대로 한다 싶었더니 드디어 양아치 근성이 나오시나? 당장 와서 돈 뱉어내든가. 광대놀이를 하든가 해. 자식아.]
얼굴에 열이 확 뻗쳤다. 분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진 은차을 호기심에 찬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한데요. 다음에 갈게요. 오늘은 좀 곤란하거든요.”
[왜. 까불다가 다리라도 부러졌어?]
“그게 아니라....”
[그거 아니면 지금 당장 와. 안 오면 너 죽는다.]
“뭐요? 죽어요? 이 아저씨가 정말!”
[노예 계약서에 인주도 아직 안 말랐다. 벌써 생까냐?]
“나라고 왜 사정이.......”
[시간 없다. 10분안에 튀어 와.]
“이씨이! 차라리 죽여라. 이 나쁜 새끼야! 야아!”
전화는 이미 끊겨져 있었다. 은찬은 뚜껑이 확 열려버렸다. 열이 솟구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우, 나쁜 새끼! 그래. 간다. 가!”
은찬은 너무 화가 나 발로 벽을 쾅쾅 차댔다.
“기다려. 새끼야! 턱주가리를 확 날려버릴 테니까!”
씩씩거리며 뛰쳐나가는 은찬의 뒤로 여학생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봤지, 봤지, 봤지? 아, 되게 멋있어!”
“짱 죽인다. 너무 터프래. 카리스마 만땅이다!”
“오, 온리 은찬! 마이 러브 찬!”
호텔로 들어와 본 것이 처음인 은찬은 호텔 뒤쪽에 경관 좋은 별관이란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직원이 안내해 주지 않았다면 필시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직원이 VIP용 빌라라고 칭하는 의문의 'S11호‘는 숲 속에 있었다. 직원이 벨을 누르자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한 번 더 눌렀고,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이 열렸다. 불쑥 맨가슴이 튀어나와 은찬은 움찔 놀랐다. 하지만 여직원은 익숙한 듯 말했다.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은찬은 도무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패션, 죽이네.”
그런가? 은찬이 어리둥절해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걸레표냐, 넝마표냐?”
이런 씨이!
“들어와.”
남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은찬은 가슴이 답답했다. 첫마디에 벌써 질려 돌아가고 싶었다. 날치기와 안면이 있고, 조금은 고의로 놓아준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말하는 투로 봐서 아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인 것 같으니까. 어쩌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불안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속인 데다 사례금까지 챙기겠다고 온 게 양심에 찔린다.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쑥스럽다. 남자의 벗은 웃통 같은거 도장에서 심심찮게 봐왔는데 어째서 갑자기 민망한 건지 알수가 없다.
“들어가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남자가 외쳤다.
“어이, 나 커피.”
“알겠습니다.”
직원이 대답하고 문을 닫았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거 같은 생각에 은찬은 몰래 다시 문을 열었다. 10cm쯤 열어놓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키가 좀 크긴 해도 저런 남자 하나쯤은 가뿐히 이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조심스러웠다. 옥탑방이 통째로 들어가도 나을 것 같은 거실이다. 엄청 넓구나. 이 아저씨 어디 있나. 카펫, 커튼, 소파, 테이블, 장식장, 조명등,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눈이 어지럽다.
“어떻게 왔어?”
어떻게 왔느냐니?
“지하철 타고 왔는데요.”
남자가 픽 웃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재수 없게 비웃을 수 있는지.
“요즘 애들은 배짱이 좋은 건지.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배달이나 할 것이지 왜 끼어들었을까? 지가 무슨 태권브이인 줄 착각한 건가? 용감한 시민상 타려고? 아니면 오지랖이 궁상스럽게 넓어서 안 끼어들고는 못 배기겠어서? 돈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 보면 투철한 시민 정신 어쩌고는 좀 그렇다. 그렇지? 앉아라, 아그야.”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다. 죽어라고 오기 싫더니. 염병할. 꼭 제비같이 생긴 인간이 말도 어쩜 저렇게 재수 없게 할까. 옆으로 쫙 찢어진 눈은 마시마로를 닮았고, 콧날은 높고 곧아서 삼각자를 세워놓은 것 같고, 입술은 확 뒤집어져서 안젤리나 졸리 같다. 선탠이라도 했는지 피부색은 앞뒤로 잘 구운 생선....아! 꽁치구이 먹고 싶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느끼하고 짜증나게 생긴 얼굴이다. 키는 180cm쯤 되려나.
“씩씩거리지 말고 앉아.”
은찬은 움직이는 남자를 째려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남자의 허리 아래가 수건 한 장 뿐일 걸 알고 나서부터 열도 나고 화도 나고 엉망징창이다. 어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탁자 위에이Td는 보랏빛 꽃만 노려 보았다.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고삐리지?”
뭐? 어처구니없어서 홱 고개를 들었지만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몇 학년이야? 땡땡이쳤냐? 아니면 퇴학당했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유리 너머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불투명 유리로 남자의 엉덩이 라인이 비쳐 보였다. 헉! 근데 색깔이 살색이다!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팬티를 갈아입다니! 도대체 저 인간은 어떤 생각을 가진 거야! 은찬은 벌게진 얼굴을 홱 돌리며 외치듯 대꾸했다.
“아뇨!”
“아니라니? 어느 쪽이 아닌데?”
“고삐리요!”
“설마 그럼 중딩?”
"아뇨! 저. 스물넷입니다!“
“야. 인마. 여기 누구 귀먹은 사람 있냐? 자식.소리는.”
그래도 벌거벗은 웃통은 뭔가. 입으려면 다 입고 나올 것이지 청바지만.그것도 골반이 다 보이도록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나오는 건 무슨 얼어 죽을 패션이란 말인가!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남자가 말했다.
“좋을 때다. 그땐 한 살이라도 올려서 어른 대접 받고 싶지.”
남자는 방문 앞에 서서 시계를 차고 있었다. 바지 다음에 시계라니, 그 인간 옷입는 순서 한번 특이하네.
“야식 배달 전문이면 낮엔 뭐 하냐?”
“알 거 없잖아요.”
“그 자식 되게 빡빡하게 구네.”
“근데 아저씨, 왜 계속 반말입니까?”
“뭐, 아저씨?”
“저보다 늙으신 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무작정 반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말 낮춰도 되겠는냐, 이렇게 미리 양해를 구하는게 기본 예의 아닙니까?”
“그러는 입은 참 예의도 있네. 어이, 근로 청년. 말까도 되겠냐? 됐지?”
“벌써 깠으면서....”
“도망간 놈은 몇 살이냐?”
“스물이오.”
은찬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모, 몰라요. 제가 그걸 어떻게....”
수습하려 해도 뒤늦은 걸 남자의 표정으로 알았다. 비웃는 꼬락서니가 독립투사 고문하는 일본 순사 같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 못한다. 내 소원은 첫째도 대한 독립이요, 둘째도 대한 독립, 셋째도 대한 독립..... 그랬어야 했는데, 핏대 세워 지킬 거룩한 명분은 아니어도 절대 말해선 안되는 것이었는데.....빌어먹을! 되는게 하나도 없네! 그래도 어떻게 덮어보자 싶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스무 살쯤 돼 보였다고요.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워낙 사람 보는 눈이 있고......”
“귀신을 속여라. 하려면 좀 잘 하든지. 어설픈 놈. 생긴 건 꼭 계집애같이 생겨가지고 하는 짓은 왜 그러냐?”
순간 욱하고 올라왔다. 계집애같이 생겼단 말, 귀에 딱지 앉도록 들어왔는데 그 말이 너무 화가 났다. 왜냐하면, 왜냐하면......내가 계집애니까. 평소에는 전혀 인식하지 않고 , 때때로 자신조차 헛갈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자긴 하다고. 근데 이 인간은 절대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한 표정이잖아. 의심조차 안 하는 모양이네. 쳇. 여자로 본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새삼 그렇게 보이고 싶을 것도 없지만.....그래, 아저씨 맘대로 생각해.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여자라고 밝히면 어떤 표정을 할지, 무슨 말을 할지 무지 궁금하지만 내가 싫어. 전혀 여자로 안 보는데, 물어보지도 않는데 ‘나 여잔데요’ 자백하는 거 구차하잖아. 열라 구차해.
“혹시 그 경찰까지 한패냐? 니들 경찰 따까리 같은 거 아냐? 아니면 앵벌이 뭐 그런 거든가. 아니라고 해도 믿을 건 아니지만.”
순간 은찬이 벌떡 일어났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망할 인간이 정말! 사포로 혓바닥을 확 문질러 버릴라! 너무 화가 나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사례금이고 뭐고 도망가는 게 장땡일 것 같았다. 그때 그 일이 발생했따. 휙 지나가려던 은찬의 어깨가 물을 마시고 있던 남자의 컵을 친 것이다.
“어엇”
입으로 들어가야 할 물이 남자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
은찬은 얼떨결에 손을 뻗었다. 정확한 의도는 남자의 가슴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닦아보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남자의 가슴에 대고 물을 닦아내려 했다. 그런데 손바닥에 피부의 감촉을 느낀 순간에야 이상한 자세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가 놀라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은찬도 굳어버렸다. 그때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어머, 세상에!”
남자의 가슴에 손을 댄 채 은찬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엔 못 볼 것 봤다는 표정의 여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서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나, 남자끼리!”
후줄근항 청바지와 후드 점퍼에 커다란 야구 모자를 쓰고 왔을 땐 껄렁한 양아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걸 보니 나름 번듯하다. 고은찬, 나이는 스물넷 이라고 주장하지만 기껏해야 스물 한둘 정도 됏을 것이다. 고용계약서에 적은 주민등록번호도 보나마나 가짜일 게 분명하다. 저런 놈들이야 뻔하지. 인생이 다 뻥이고 사기고 장난이지. 175cm 이상은 안 될 거 같은 키에 골격은 가는 편. 피부가 희고 눈은 크고 동그란데다가 입술의 색소가 유난히 붉다. 어디선가 본 아이돌 그룹의 리더싱어를 닮았다. 요즘엔 얼핏 보면 여자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한 남자들이 인기다. 고은찬도 그 부류다. 입 다물고 가만있으니 분위기가 묘하다. 인물이 아깝다. 딕이 보면 침을 질질 흘리겠군. 한결은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오는 은찬을 주시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느끼도록 일부러 더 뚫어지게 은찬을 보았다. 드디어 여자가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에 앉는 은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는 분이세요?”
“그런 거 같네요.”
“그럼 가서 인사하고 오세요. 전 괜찮으니까요.”
어디서 저런 구닥다리 양복을 구했을까? 자식, 입으려면 좀 몸에 맞는 걸 입지.
“지금 생각 중입니다. 아는 척을 할까 말까.”
“왜요?”
쪽 팔려서, 7080콘서트도 아니고 저 넓적한 넥타이는 뭐야?
“좀 껄끄러운 일이 있었거든요.”
계집애가 호들갑을 떨면서 게이니 어쩌고 하진 않았으면 고은찬은 당장 경찰서 감이었다. 어머니에게 혼나고도 호텔을 들락거리며 귀찮게 하던 계집애가 고은찬과 같이 있는 걸 보고 질겁했다. 눈 버렸다는 표정으로 도망가는 여자를 보고 한결의 머릿속에 형광등이 번쩍했다. 결혼을 하라고? 어디 시킬 수 있으면 해보시지. 고은찬에게 제의를 했다. 아르바이트해 볼 생각 없냐고. 그런데 고은찬은 날치기랑 한패인 게 다 들통이 났는데도 뻔뻔하게 선불을 요구했다. 그거도 사례금의 배를 달라고. 이제 와 말이지만 뭘 믿고 준다고 해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경찰에 잡하넣지 않는 조건으로도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었는데.
“저런 타입 어떻습니까? 요즘 예쁜 남자가 인기라던데?”
“전 그다지.”
오늘 맞선을 보고 있는 여잔 내숭을 떠느라 말을 지나치게 아끼고 있다. 지루해 하품이 나올 것 같다. 그때 웨이터가 은찬의 테이블로 다가서는 게 보였다. 입 모양을 봐서 알 수 있었다. B코스로.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한결이 섣루러 다가갔지만 웨이터는 이미 주문을 받고 떠난 상태였다.
“야, 고은찬. 여기서 만나는구나!”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표정에는 화가 난 채로 은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시야에는 은찬의 정면과 한결의 옆모습이 보였다.
“하필이면 제일 바쁜 금요일 대낮에 서을 볼 게 뭡니까? 오후 수업도 꽉 찼구먼. 아저씨 백수예요?”
“시끄러, 인마. 너, 누가 주문하랬어?”
한결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힐난했다.
“그럼 이런 데 와서 물 잔만 빨고 있어요? 이상하게 생각할거 아니에요.”
“네가 계산해, 인마.”
“나 차비밖에 없는데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너한테 줄 거 이미 현찰로 계산 끝냈잖아. 민증은 갖고 왔냐?”
“부, 분실했다 그랬잖아요. 재발급 신청했는데 아, 아직.....”
“휴대폰에 사진 박아놨으니까 딴 짓할 생각은 아예 안하는게 좋을 거다. 여차하면 경찰서 담벼락을 네 몽타주로 도배해버릴 거니까.”
“몽타주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사람이 좀 믿고 모든걸 똑바로 생각해야지. 사람이 왜 그렇게 삐딱해요?”
“뭐, 인마!”
“내가 무슨 범죄자냐고요.”
“그러니까 잘하란 말이야 자식아. 근데 이 양복은 뭐야? 아버지 거냐?”
“양복 입으라면서요.”
“양복도 한 벌 없어? 아, 됐고. 1단계로 가자.”
“벌써요?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나도 안 먹었어, 인마.”
“그러니까 우선 밥부터 먹고....”
말을 하다 멈춘 은찬의 시선이 여자 쪽으로 향했다. 한결은 돌아보지 않고 끔벅거리는 은찬의 눈만 보았다.
“왜?”
“저 여자 그 여자네요? 사진.”
“사진?”
“지난번에 전화번호 적어준 종이....아! 그거 내가 안 드렸던가?”
“손 올려봐.”
“꼭 이렇게 해야 돼요?”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은찬이 팔을 올렸다. 한결은 테이블 위로 올라온 은찬의 팔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마치 다정한 연인이 그렇듯이.
“웃어. 인마.”
“지금 이게 웃고 있는 거거든요. 아저씨”
한결은 피식 웃었다.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어 거리를 좁히자 은찬의 일그러진 미소가 더 찌그러졌다.
“아저씨 변태죠?”
“까불래?”
“이게 정말 효과가 있다고 보십니까?”
“너도 봤잖아. 저번에 그 여자.”
“예쁘던데...”
“왜, 관심있어?”
“삐딱이 아저씨가 찰 이유가 없어 보이던데. 차였으면 차였지.”
“너 맞을래?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아뇨, 삐딱한 변태로 보여요.”
“이 자식이!”
“쉬!”
“너 나중에 봐. 자. 시간 됐다.. 20분 뒤에 2단계로 간다.”
일어서기 전에 한결은 손을 뻗어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멈칫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한결은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쌓인 얘기가 좀 있어서.”
여자는 이미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리스트중에 첫 번째인 여자, 좋은 집안에 똑똑하고 예쁜 여자라는 얘기다. 그래서 어떤 기부이냐면 우유를 부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흰 건반, 검은 건반, 그 반듯한 질서를 깨고 싶었듯이....
“식사부터 하시죠.”
한결은 물 잔으로 손을 뻗다가 이상한 걸 느꼈다. 손가락에 좀 전의 감촉이 살아나 찌릿찌릿한 것이다. 녀석의 새까만 머리가. 머릿결이 가늘고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보다. 멧돼지 털도 새끼땐 부드러우니까. 그런데 왜 쓰다듬었지? 아, 설정이었어. 그래. 보다 효과적인 설정. 우적우적 잘도 먹는다. 음식이 나오기가 무섭게 쓱쓱 잘도 비운다. 그야말로 멧돼지 급 식욕이다. 게다가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혼자 밥 먹으면서 저렇게 히죽대는 녀석은 처음 본다. 아이스크림과 타르트를 들고 온 웨이터에게 간 이라도 빼줄 듯이 환하게 웃는다. 혀가 녹을 정도로 단 걸 덥석덥석 먹더니 손가락까지 쪽쪽 빤다. 덕분에 이쪽의 식사가 더 지루하다. 여자는 제 주먹보다 훨씬 작은 스테이크를 2퍼센트씩 잘라 먹는다. 애초에 다져달라고 할 것이지.
“워싱턴 대학에서 비즈니스 스쿨을 마치셨다고요?”
이 여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무튼. 여자의 직감이 의심으로 솟나보다. 갑자기 학력을 따지고 들기 시작하는 걸 보니.
“거기에 들어간 기억은 있는데 마친 기억은 없습니다.”
“네?”
“거기가 공부만 하기에는 경치가 워낙 좋거든요.”
“시애틀이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란 얘기는 들었어요.”
“은둔하기 좋죠. 자살하기도 좋고. 눈뜨면 비, 아니면 안개라서 멀쩡히 걷다가도 전봇대에 머리 박고 감전이라도 됐으면 싶거든요.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위장에다 한 번에 16온스씩. 주 평균 40회 채워 넣으면 되거든요.”
“뭘 채워 넣어요?”
“커피.”
대답한 한결의 손을 들어 웨이티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여자는 아직 3분의 1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나 상관 말고 천천히 드세요. 음식 남기는 거 안 좋아하죠? 그럴 거 같았어요. 좋은 습관입니다.”
접시를 치우려던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나이프로 고기를 찔러댔다. 20분이 다 되었지만 녀석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결은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은찬에게 눈짓으로 채근했다. 하지만 녀석은 기어이 접시를 깨끗이 핥고서야 행동응 개시했다. 물 잔 쓰러뜨리기다.
“어엇!”
물이 은찬의 무릎을 적시고 잔은 바닥으로 떨어져 퍽 깨졌다. 은찬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한결이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결은 다가오느 웨이터에게서 수건을 홱 뺏어 들고 은찬의 허벅지를 닦았다.
“괜찮아?”
놀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한결을 내려다보는 은찬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하는 표정이었다. 한결은 두 눈에 힘을 주고서 은찬에게 제대로 연기할 것을 강요했다.
“저, 저리 꺼져. 이제 나한테 신경 쓸 것 없잖아. 우, 우린 다 끝났어! 나쁜 놈!”
은찬이 거칠게 한결의 어깨를 팍 밀쳤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 힘이 실린 가격이었다. 윽! 한결은 신음이 나오는걸 꾹 참았다. 저, 자식이! 부아가 치밀었지만 마직막 연기에 혼신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쌤통이란 표정으로 돌아서 가는 빌어먹을 녀석을 애절히 부르는 것이었다.
“차, 찬아!”
한숨을 쉬고 제자리로 돌아온 한결을 맞은건 충격과 의혹에 휩싸인 여자의 쌀쌀맞은 눈초리였다. 이제 남은 건 극적인 엔딩. 한결은 자숙의 표정으로 고해하듯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게이에 대해서.”
학생들의 봄 방학이 끝나 오전 수련이 비었지만 달가운 건 아니다. 도장에 등록하는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점심에 카레 해먹을까?”
이렇게 말해도. 아마 완성은 저녁때쯤이겠지.
은찬은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는 엄마를 잠깐 보고 볼펜을 굴렸다. 깨알같이 글자를 써 붙여놓은 볼펜이 데구루루 굴렀다. 볼펜은 삼겹살을 가리켰다.
“엄마, 삼겹살이라는데?”
은찬은 볼펜을 들고 엄마에게로 쫓아갔다.
“이그!”
국자 찍기 작렬.
“아야!”
“가서 감자나 사와!”
고기를 못 먹은 지 어언 8일째. 소라도 되고 싶다. 되새김질이라도 하게. 그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스테이크가 아른거린다. 그 이후 두 탕이나 뛰었건만 왕재수 짠돌이가 주수만 먹으라고 윽박질러서 고기는 구경도 못했다. 도대체 이 괴상한 아르바이트는 언제쯤 끝나려나. 덕분에 동옥 아줌마 반지는 해결했지만 연재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생활비가 모자라서 고깃간 구씨 아저씨한테 돈을 좀 꾸었기 때문이다.
“야, 고은찬.”
빚쟁이 구씨 아저씨다.
“어머니 계시냐?”
“네. 왜요?”
“아, 이거 좀 드리려고.”
“그게 뭔데요?”
계다을 내려온 은찬은 좁은 입구에서 구씨 아저씨와 마주쳤다.
“이거? 호두 기름. 시골 큰댁에서 보내왔는데 이게 감기에 좋거든. 어머니 감기 걸리셨다면서?”
“다 나았는데.”
“그, 그래도 먹어두면 좋아.”
“그래요? 고마워요. 잘 먹겠습니다.”
“아, 아니. 내가 갖다놓지 뭐. 너 나가는 길 아냐?”
“괜찮아요. 제가....”
“내가 간다니까! 어, 어서 가봐”
아저씨는 기름병을 뺏기기라도 할까 봐 꽉 쥐고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섰다. 은찬은 벙벙해져 서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여기 학교인데요. 은새 담임입니다.]
“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은찬은 깜짝 놀라 부동자세로 90도 인사를 꾸벅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학교가 경찰서도 아닌데...
[은새 오빠 되죠?]
“네? 오빠요?”
[생활 기록부에 오빠라고 되어 있는데.]
헉! 이것이 공문서에까지 장난질을. 쯧!
[집에 전화를 했더니 결번이라던데. 전화번호 바뀌었나요?]
“안 바뀌었는데요. 몇 번으로 거셨는지....”
느닷없이 걸려온 선생님의 전화는 어머니가 학교에 좀 와줬으면 하는 거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쭈었더니 예상대로 은새가 또 사고를 쳤단다. 아이들이랑 명품계를 조직했다나. 거기까지였으면 선생님까지 알 도리가 없었을 텐데. 얘가 겟돈을 횡령해다는 제보다 들어왔다는 것이다. 횡령이라니?
“내가 이 화상 잡기만 해봐. 망할 년! 아우, 씨이!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평생 태클이야! 정말 미치고 팔딱 뛰겠네! 고은새. 이걸 어떻게 확 작살을 내지! 잡히기만 해봐! 날계란으로 얼굴을 확 문대버릴 거니까!”
그길로 은찬은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PC방을 뒤지고 공원을 수색하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고은새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구근 분은 분대로 치솟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도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 반짝거리는 상자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이게 뭐야?”
“언니들이 막 와가지고 놓고 갔어요. 맘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자꾸 들어와서. 씨이.”
승경의 잔소리를 들으며 포장을 뜯어봣다. 편지에 초콜릿, 편지에 초콜리, 편지에 초콜릿. 그냥 초콜릿.........
“누가 놓고 간 거라고?”
“어닌들이오. 전기 동문여고 교복을 입은 언니들, 사범님 후배래요.”
“걔들이 언제 왔다 갔지? 수업 중 아닌가?”
“몰라요. 되게 못생기고 뚱뚱하고, 공부도 열라 못하게 생겼어요.”
“근데 오늘 무슨 날이니? 내 생일인가?”
“발렌타인데이잖아요. 사범님은 그런 것도 몰라요.”
“아하....얘들아. 수련 시간 됐다. 모여! 집합!”
“야아아아!”
“차렷! 국기에 대한 경례!”
점심을 굶고 여이은 수련에 기진매진해 버렸다. 틈틈이 먹은 초콜릿 때문에 혀바닥이 아렷다. 마지막 수련을 마치고 나니 눈앞이 노랗다. 입은 단데 위에 쓰리고, 은새 걱정에 머리도 아팠다. 우유 한 잔 겨우 마시고 샤워도 못한 채 도복을 갈아입었다. 은새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애 어디 쳐박혀 있는 거야! 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도장을 나오는데 꽃과 선물을 든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선배님!”
“사범님! 우리 왔어요.”
도장을 거쳐간 아이들도 있고, 학교 후배들도 있었다. 지쳐반길 히도 없던 은찬은 번뜩 생각나는 게 있어 아이들을 붙들고 물었다.
“야, 니들 은새 못 봤냐?”
“은새? 은새가 누구예요?”
“선배님 동생이잖아. 우리학교 3학년.”
“그래 맞아. 혹시 못봤어?”
“못 봤는데요?”
“오늘 발렌타인데이니까 남자 친구 만나러 갔겠죠. 뭐.”
남자 친구? 설마 그 까마귀 양아치?
“선배님. 우리 같이 저녁 먹어요.”
“저희가 삼겹살 사드릴게요.”
“어? 사, 삼겹살? 아, 안돼. 미,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바쁘거든.”
으. 삼겹살. 이놈의 고은새가 웬수다 .웬수!
“아이. 사범님. 오늘 발렌타인데이란 말예요. 같이 노래방가요.”
피눈물을 삼키며 조르는 아이들을 밀어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은새가 아닌가 싶어 얼른 전화를 받아TEk.
"여보세요?“
상대가 말이 없었다. 다급해진 은찬은 전화기를 바짝 대고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은새지? 야, 고은새!”
[아우, 이 자식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은새가 아니다.
[고막 터질 뻔했잖아. 자식아!]
“아...왜요?”
[왜라니. 내가 너한테 볼일이 한 가지밖에 더 있어? 지금 빨리 튀어 와. 강남대 앞에 있는 조슈아 알지?]
“지금 좀 바쁜데, 다음에 가면 안 되겠습니까? 급한 일이 좀 생겨서요.”
[뭐? 이 자식이 따고 배짱이네. 내가 자선 사업가로 보여? 돈 받았으면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몇 번 시킨 대로 한다 싶었더니 드디어 양아치 근성이 나오시나? 당장 와서 돈 뱉어내든가. 광대놀이를 하든가 해. 자식아.]
얼굴에 열이 확 뻗쳤다. 분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진 은차을 호기심에 찬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한데요. 다음에 갈게요. 오늘은 좀 곤란하거든요.”
[왜. 까불다가 다리라도 부러졌어?]
“그게 아니라....”
[그거 아니면 지금 당장 와. 안 오면 너 죽는다.]
“뭐요? 죽어요? 이 아저씨가 정말!”
[노예 계약서에 인주도 아직 안 말랐다. 벌써 생까냐?]
“나라고 왜 사정이.......”
[시간 없다. 10분안에 튀어 와.]
“이씨이! 차라리 죽여라. 이 나쁜 새끼야! 야아!”
전화는 이미 끊겨져 있었다. 은찬은 뚜껑이 확 열려버렸다. 열이 솟구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우, 나쁜 새끼! 그래. 간다. 가!”
은찬은 너무 화가 나 발로 벽을 쾅쾅 차댔다.
“기다려. 새끼야! 턱주가리를 확 날려버릴 테니까!”
씩씩거리며 뛰쳐나가는 은찬의 뒤로 여학생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봤지, 봤지, 봤지? 아, 되게 멋있어!”
“짱 죽인다. 너무 터프래. 카리스마 만땅이다!”
“오, 온리 은찬! 마이 러브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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