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발표 때 천경자에 대해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아는 사람과 얘기하던 도중 떠올린 이름..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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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는 1924년에 태어나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수학하였다. 1955년 대한 미협전 대통령상과 1983년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천경자의 그림은 그 자신의 생활감정을 포함하여 자연의 아름다움, 생명의 신비, 인간의 내면세계, 문학적인 사유의 세계 등 폭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그는 해방 이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으로서 우뚝하다. 더구나 채색화를 왜색풍이라 하여 무조건 경시하던 해방 이후 60년대까지의 그 길고 험난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채색화 붐이 일고 있는 오늘을 예비했던 그 확신에 찬 작가정신으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는 더욱 확고하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심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는 꽃과 여인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통한다.  일상적인 감정을 그림 속에 그대로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체험적인 인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꽃과 여인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상징성을 내포한다. 일상적인 생활감정 뿐만 아니라, 속내를 은유적이고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홈페이지 내용 참조)

그녀의 그림을 보면 꽃과 나비, 여자, 등이 등장하는데 색감이 다소 화려하고 그림체도 멋지다.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화풍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그림의 내면에서 나는 종종 외로움을 느끼곤했다. 그림 이곳 저곳에서 나는 그녀 천경자 자신은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관심이 갔고 그래서 그녀를 알아보고 조사해서 발표하게 됐었던 거 같다.

나의 발표내용은 전혀 전문적이고 멋지게 세련되지도 않았었다, 다만 그저 내 마음 속에서 내 눈에서 그려내진 그녀의 모습을 그래도 표현했고 그녀의 그림에서 발견한 많은 것들을 쏟아내다보니 내 자신도 완전 몰입해서인가 너무 재미있게 발표를 했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발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 날 안 사실이지만 담당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던 작가가 천경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수업에서 내가 좋은 점수를 받아내게 되었다는 얘기..

여하간 그런 그녀 천경자에게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데, 여자로서의 삶 자체도 평탄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붓을 꺾게된 일명 미인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교수신문] 2006년 09월 22일 (금) 23:09:50 김양희 / 여성학과 석사과정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화가,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나혜석, 박래현 그리고 천경자. 몇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천경자의 <미인도> 위작 사건은 결국 그의 붓을 꺾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연 그의 그림을 위작한 범인만이 그를 괴롭혔을까? 화가의 주장을 믿어주기는 커녕 그를 ‘환상이나 좇는 노화가’라고 몰아갔던, 지독하게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미술계의 말, 말들이 한 여성화가의 창작욕을 소강시킨 건 아닐까? 당시 이 사건을 둘러싼 남성중심적인 미술계 담론들을 분석한 소논문을 하나 소개한다.  - 편집자주-


1. 문제 제기
화가 천경자(千鏡子, 1924-)는 지난 1970-90년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던 내로라하는 우리나라 근대 여성 화가다. 그는 주로 뱀, 꽃, 새, 나비 등 동식물을 배치한 초상화류와 누드화 등을 주로 그렸는데 독특한 화풍으로 인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자적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천경자는 지난 1952년 뱀 서른다섯 마리를 그린 ‘생태’ 그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화단에 알리고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1954년부터 1974년까지 20년간 홍대 미대 교수직을 역임했고 1990년대 초까지 정력적으로 작품 활동에 임했다. 그의 작품은 스스로가 창조해 낸 독특한 환상 속의 여성 이미지로 점철돼 있으며 그것이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술평론가 강성원은 한국 근대 여성작가의 대명사로 나혜석과 천경자를 꼽고 천경자를 당시 한국 여성문화가 지닌 의식구조를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고 평가했다.1) 그런 천경자는 지난 199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미인도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미인도> 사건’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 가운데 천경자의 ‘<미인도>’라는 그림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에 전시되면서 시작된다.  천경자는 즉각 ‘자신의 그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현대미술관측은 ‘진품이 맞다’고 맞섰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제3자적 전문가집단인 한국화랑협회가 ‘진품 판정’으로 현대미술관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에 천경자는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느냐’며 절규했지만 화랑협회는 ‘자기 자식을 몰라 보는 어미도 있다’면서 그녀의 주장을 일축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붓을 꺾은 채 미국으로 떠난다. 이 사건은 지난 1999년 고서화 위조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춘식이 ‘<미인도>는 내가 위조했다’고 진술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맞는다. 하지만 검찰은 3년인 미술품위조사건 공소시효가 끝났다며 수사를 하지 않았고 국립현대미술관측과 화랑협회는 진품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작가인 당사자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는 왜 진품이라고 주장했을까. 그리고 천경자의 그림에 대한 당시 평론가들의 입장은 어떠했으며 과연 그들은 당시 천경자의 입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했을까. 이 글에서는 우선 <미인도> 사건 당시와 위조범 검거 이후의 신문 기사와 미술잡지를 중심으로 당시 평자들이 천경자의 입장을 어떻게 논했으며 그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2. 미인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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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는 문제의 <미인도>가 지난 81년 둘째 딸을 모델로 그린 작품을 흉내 낸 것이라며 위품의 근거로 자신의 화풍과 달리 1) 머리가 검게 개칠(改漆)돼 있고 2) 그려본 적 없는 흰 꽃이 화관으로 모델머리에 씌워져 있으며 3) 연도가 한자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로 쓰여 있는 점,  자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혼이 없다고 평했다.2)  

반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이경성)측은 현미경 분석과 안료 화학 실험 등 과학적 실험을 내세워 진품임을 주장했다. 관 측은 우선 1) <미인도>는 81년 제작된 것이 아닌 표시된 제작연도인 77년 당시나 그 비슷한 때 그려진 것으로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으로 박대통령 시해사건 뒤 김씨 재산이 국가에 환수될 때 재무부, 문공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수장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작품은 환수 당시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진품으로 감정했으며 90년 금성출판사의 ‘한국근대회화선집’에 이 작품이 실릴 때 천씨가 알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2) 석채, 호분, 분채 등 안료화학실험에서 천씨가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일본제 안료와 동일하다는 점, 3) 70년대 후반에 사용했던 안료와 <미인도>의 재료가 동일하다는 점을 확인했다.3) 

하지만 천경자는 ‘내가 낳지도 않은 자녀를 남들이 당신 자녀라고 윽박지르면 어떡하느냐’며 ‘미국, 일본에 의뢰해서라도 가짜임을 밝히겠다’고 완강히 맞섰다.4) 여기에 공정성을 답보한 제3자로 한국화랑협회 감정위가 뛰어들었으나 결국 국립현대미술관의 손을 들어 주고 말았다. 한국화랑협회는 1991년 4월 11일 문제의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공식 발표했다.5) 이 사건으로 큰 상처를 입은 천경자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예술원 회원 자격을 반납한 채 절필선언을 한다. 그가 큰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잊혀진 듯 했던 이 사건은 1999년 7월 7일 고서화 위조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춘식이 ‘천화백의 미인도는 내가 84년에 위조한 그림’이라고 검찰에 진술함으로써 새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검찰은 미술품 위조사건의 공소시효가 3년이어서 처벌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수사를 하지 않았다.6) 위조범 체포로 감정협회의 감정 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자, 감정위원들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실수가 있을 수 있다’며 한 발 물러섰다.7) 국립현대미술관은 ‘8년 전의 감정을 뒤집을 만한 근거가 없다’며 일축했다. 결국 상처받은 화가의 자존심은 끝내 회복되지 않은 채 사건은 유야무야 마무리됐다.


3. 천경자에 관한 평가들

3-1. 미인도 사건 당시 / 꿈, 환상, 몽환적 세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천경자의 그림 세계를 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환상적, 몽환적 이라는 단어다. 천경자 작품의 환상성은 평탄치 않았던 개인사 속에서 여성으로서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사람의 내적인 고독과 그것을 위로코자 하는 의도, 나아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적극적 여성성 발견과 소극적 저항이었다는 90년대 후반의 평보다는 90년대 초 중반까지 ‘꽃무리와 환상의 나래’8), ‘꽃무리 속의 고독한 여심’,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 등 꽃, 환상, 여심 등 여성화가 범주에 국한되는 평으로 일관됐다. 작품에 대한 그런 평가는 화가 천경자 개인에 대한 평가로 나아가는 성향을 보인다. <미인도> 사건 당시 한 미술 전문 월간지는 ‘작품은 화가의 자식과 같다‘는 천경자의 주장을 비약이라면서 천경자 작품과 화가 자신을 뭉뚱그려 ‘나르시스적이고 유미주의적‘이라고 꼬집는다.

평생을 화업으로 살아온 그녀이지만, 작품에 대한 이러한 비객관적인 언급과 미심쩍은 작품의 유통이 드러남은 그후문제의 경과 과정에서 비본질적인 점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작품은 작가의 자식이라는 비약된 논리에 앞서 그녀에게 나타나는 나르시스적이고 유미주의적 여성상이 과연 ‘현대여성’인가 하는 문제와 또, 한 예술가의 고정된 트레이드 마크는 조악한 키치(Kitsch)를 발생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왜 작가 자신은 설사 그것이 가짜라 할지라도 평생을 화업으로 닦아온 ‘예술가 답지 않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는가? (<미술세계>, 1991년 4월호)
 
이 글에서 도대체 평생을 화업으로 닦아온 ‘예술가’답지 않은 반응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 작품이 아니라고 나서서 방방 뜨지 말고 좀 차분히 앉아서 지켜보라는 뜻인지. 이 글은 작품의 진위를 논하기보다는 작가의 행동 양태를 꼬집고 있다. 3-2. 나이탓, 양비론사건 당시 미술계 일각에서는 천경자의 나이가 68세였던 점을 들어 ‘나이 탓’을 들었다. 당시 천경자는 식음을 전폐한 채 자신의 주장을 믿어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했다. 하지만 미술계 일각에서는 노화가가 기억력이 쇠해 자신의 작품을 몰라본다는 주장이 제법 설득력 있게 먹혀들어갔다.  심지어는 자기가 그려놓고도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설사 진품이라고 해도 작가가 진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돈벌이를 위해 싸구려 그림을 그린 것이라 자존심이 상해 그런 거니 굳이 묻지 말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제 진짜냐 가짜냐를 놓고 재미있어 하거나, 『천경자씨 많이 늙었나 보지』하면서 흉보는 일은 그만 할 때가 됐다. 설사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해도 작가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데는 또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림을 돈으로 따지고 상품으로만 보는 우리의 현실에서 작가들도 예술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기 때문에 혼이 들어가지 않는 그림을 그려내는 병든 입장에 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는 그래선 안 된다. 하지만 예술가를 병들게 하는 우리 모두의 인식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작가 자신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춰내가면서까지 태작 하나의 진위 여부를 따지느라 좋은 예술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서울신문>, 1991. 4. 13 문화부 이헌숙 기자)

미술계의 전반적 입장은 양비론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화가 천경자간의 진위싸움은 미술계 전체에서 볼 때 볼썽사나운 집안 싸움이므로 양자가 자제해야 한다는 게 분위기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천경자의 위작 주장은 평생을 환상과 몽환의 세계에서 헤맨 한 여성 노화가의 기억력 감퇴에서 벌어진 남부끄러운 집안 싸움에 불과했던 것이다. 작가와 전문가의 견해가 서로 맞설 때 우선 어느 쪽을 존중해야 할까?  작가 자신이 가짜라고 주장, 파문을 일으킨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원로 한국화가 천경자(66)씨 작품 ‘미인도’를 둘러싼 위작 시비는 작가와 전문가의 팽팽한 의견대립으로 어느 쪽이 우선이라 할 수 없이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아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를 놓고 볼 때상황은 대체로 전문가들의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펼쳐져 온 것으로 보인다. …… 한편 두 당사자인 천씨와 국립현대미술관이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데도 이 사건을 보는 미술인의 눈은 대체로 냉소적인 편이다. 가짜 작품이 많이 나도는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풍토로 인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위작시비에 물린 탓도 있지만, 진위가 불분명한 그림이 나타났다고 대중적인 화젯거리로 지나치게 요란 떠는 분위기는 두 당사자나 미술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이들의 ‘관전평‘이다. (<한겨레신문>, 1991. 4. 13)

이 기사는 2005년 현재 아트스페이스서울 관장인 이주헌 당시 한겨레신문 미술담당 기자가 쓴 것이다. 한편 당시 <조선일보> 이태익 문화부 미술담당 기자는 91년 4월 14일자에서 화랑협회가 서둘러 만장일치로 진품 판정을 내려버린 점, 국립현대미술관이 과학적 실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진품 결론을 내려버린 버린 것 등 석연한 점들을 지적하며 다수의 횡포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미술계는 천경자의 작품세계가 환상의 세계에 천착했다는 점을 계속 언급하면서 ‘현실성 없는 그’를 논했다. 천경자의 작품이 과거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허황한 꿈이라고 평했고 그가 틈날 때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SF영화를 빌려다 본다는 점을 들어 환상세계에 대한 동경이 현실감각을 잃게 한 것처럼 말했다. 최광진 호암미술관 큐레이터는 천경자가 실제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두려워했다면서 “시골 어머니 같이 다정다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사람을 대했다. 일종의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삭막한 현실생활에 대한 방어 수단”이라고 말했다.9)    
    

3-3. 위조범 검거후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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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9년 위조범이 검거되고 나자 평자들은 일제히 동정론적 입장으로선회하고 나름대로의 해법을제시했다. 당사자의 주장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든가, 위조범에게 직접 그려보게 해야 한다든가 객관적 감정 기구를 설치하라는 등이 그것이다. 또 <미인도>를 태워 없애든지,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 감정위원회를 배제한 제3의 감정위를 구성해서 진위 여부를 다시 가리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100% 진품을 확신했던 화랑협회 감정위에서도 ‘실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시인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측은 8년전의 진품 감정을 뒤집을만한 근거가 없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실수가 있을 수 있지요’. 최근 위작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였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91년 감정했던 당시 화랑협회 감정위원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천경자 화백이 미인도는 아직도 진품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이지만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감정이 100%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없다고 털어놓는다. (<동아일보>. 1999년 7월 13일자)

98년을 즈음해서 천경자 작품의 여성성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전까지 환상, 몽환, 꿈과 정한의 세계라고 일컬어졌던 천경자 작품 속의 여자와 꽃들에 대해 ‘흔들리지 않을 여성성을 확보하고자 하면서 구태의연해 보이는 여성의 삶에 대한 환멸의 치유책’이라는 평가가 제기됐다. 또 천경자 작품속의 여인들은 모두 관능적이며 도발적이고 저항적이라며 작품 속의 관능성이 자기애의 한 표현이자 여성애의 한 표현이라는 평론이 대두됐다.10)  이 평론은 ‘<미인도> 사건’ 당시 양비론을 주장했던 한겨레신문 기자출신 미술 평론가 이주헌의 평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4. 결론
당시 미술계의 권력 국립현대미술관은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절규하는 화가에게 ‘과학적 실험’을 들어 서둘러 진품 판정을 내려버렸다. 제3자적 감정기구라던 화랑협회 감정위는 작가의 말도 들어보지 않은 채 황급히 진품 판정을 내려버렸다. 미술평론가들은 미술계라는 대의를 위해 시끄러운 집안싸움은 삼가자는 대의명분론과 양비론을 들먹였다. 이 와중에서 가장 큰 희생양은 화가 자신이었다.

 천경자는 ‘평생을 환상과 몽환의 세계에서 헤매던 화가이며 나이 탓에 기억력이 감퇴해 자기 작품을 몰라 본 정신 나간 화가’로 몰렸다. 아마도 미술계의 권력인 현대미술관은 위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화랑협회는 현대미술관의 권력에 도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당사자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천경자는 미술품 애호가들 사이에 인기 있는 화가였지만, 미술계 권력에 있어서는 주변부에 머물렀던 것 같다. 아마도 미인도 사건이 터졌을 때 그를 지지해줄 인사들이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추정해 본다. 만약 천경자가 미술계 권력을 잡고 있는 남성 후배들을 거느린 남성 화가였다면 위작 시비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화가 자신의 몽매 탓으로 화살이 돌려지는 대신 음모론이 제기됐을 수도 있고 미술계의 남성 후배들이 스승을 옹호하는 반론을 사방팔방에서 펼쳤을 수도 있다. 화랑협회 감정위에도 후배들이 있어 일방적으로 진품 판정을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고 정, 관, 법조계 인맥이 위작 가리기에 나섰을 수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해도 최소한 ‘나이 탓에 제 작품도 몰라보는’ 식의 평가는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1991년 ‘<미인도> 사건’은 비단 미술계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전문 여성의 지위와 위치가 타자에 의해 규정된, 허술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임을 보여주는 한 사례인 것이다.
 

■참고문헌■
강성원, 『그림으로 보는 한국 여성미학의 사회사』, 1998
이주헌,  『내 마음속의 그림』, 학고재, 1997
이문정, 「한국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성 연구: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를 중심으로」,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조형예술학과 석사 논문 (미간행) 2004
노시은,  「천경자 회화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회화학과 동양화전공 석사 논문, 1988
서성록,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95 『한국근대회화선집:한국화 11: 장우성/천경자』, 금성출판사, 1990
천경자,  『千鏡子 : 꿈과 情恨의 세계』, 서울 : 호암미술관, 1995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세종문고, 1995
천경자,  『내 슬픈 傳說의 49페이지: 千鏡子 그림이 있는 自敍傳』, 문학사상사, 1978
천경자,  『자유로운 여자』, 집현전, 1979
천경자,  『꽃과 색채와 바람』, 자유문학사, 1986
천경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자유문학사, 1984

한겨레신문, 1991년 4월 13일자
경향신문, 1991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1991년 4월 11일자
조선일보, 1991년 4월 14일자
서울신문, 1991년 4월 13일자
경향신문, 1996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1999년 7월 13일자
미술세계, 1991년 4월호
미술세계, 1999년 8월호
가나아트, 1998년 가을호

자신의 그림을 못알아보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 보통 끄적인 낙서조차도 자기 그림인걸 알아보는 판에 자신이 그리지 않은 그림을 어미도 제자식을 몰라볼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그녀를 믿어붙였으니 게다가 정신나간 사람으로 몰았으나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었을지 그로 인해 좋은 작가 한명이 절필을 하게 된다는 건 참으로 잔인한 일인 것 같다.

참고 : 천경자님의 그림을 보고 싶으신 분은
http://www.kcaf.or.kr/art500/chunkyungja/main.htm 으로 가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