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선기도 요즘 너무 바쁘고. 아무래도 직원을 새로 뽑아야 할까 봐요."
[ 괜히 헛바람만 드는 거 아냐? 진짜 노래를 좀 하긴 해?]

 은찬은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러 가는 길에 한결과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 뿅갈 정도로 잘하죠. 나라도 음반 내주고 싶을 정도예요."
[ 네 귀를 어떻게 믿어? 노래방에서 사는 놈들 웬만큼 노래 못하는 놈 없어.]
" 오디션이 붙었는데 무슨 말을 더 해요? 심사위원들이 핫바지겠어요? 계약금을 거저 주겠느냐고요. 매일 나만 갖고 그래, 쳇."
[ 야, 끊자. 회의 들어가야 돼.]
" 나도 강의실에 다 왔네요. 끊어요."
[ 잠깐만. 내일 점심 어디서 먹는댔지? 시간 맞춰 데리러 갈게.]
" 그럴 거 없어요. 지하철 타고 가면 한 번에 가는데요 뭐. 입구에서 봐요."
[ 지난번처럼 또 늦을까 봐 그런다.]
" 딱 10분 기다려놓고선 생색은."
[ 12분.]

 은찬은 벌써 강의실에 도착했고, 한결은 회의실로 들어가야 하지만 좀처럼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둘은 마음속에 있는 뜨거운 말들을 감춘 채 짓궂게 굴었다.

[ 야, 남자끼리 데이트하는 걸로 오해 안 받게 입고 와.]
" 그럼 아저씨가 치마를 입고 오시죠."
[ 너 자꾸 들이댈래? 여자가 말이야, 조신하게 네네 하지 못하고 말이야.]
" 조신하지 못한 여자들 모아서 아저씨 안티 까페 만들까 보다. 무섭죠?"
[ 팬 까페로 돌리는 건 일도 아니지. 내 사진 한 장만 날려주면 금방 돌아설걸. 이제 진짜 들어가야 돼. 뽀뽀해 봐, 보들이.]
" 저는 아직 안티 까페 소속이거든요, 에로 아저씨. 끊어요."

 둘은 킬킬 웃으며 전화를 끊고서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한결은 회사에서 과장으로 승급을 했고 부서도 회계과로 옮긴 상태다. 차세대 경영주에게승급이란 건 사실 무의미하지만 어쨌든 한결은 단계를 밟아가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한성과 선의의 경쟁을 하기로 한 이상 질 수는 없다. 좋은 라이벌이 있다는 건 회사를 위해서도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다음 날, 은찬은 몇 번이나 옷장을 헤집다 결국 은새에게 조언을 구했다. 은찬의 옷장에는 청바지와 셔츠, 그리고 커다란 점퍼가 전부였다. 그 이외 엄마 결혼식 때 입었던 바지 정장 한 벌이 있지만 놀이공원에는 맞지 않았다. 은새의 옷을 받아놓고 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는 은찬을 은새가 계속 다그쳤다. 하는 수 없이 꽃무늬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여성적인 재킷을 몸에 걸쳤다.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고, 또 그가 남자끼리 데이트 어쩌고 한 말이 걸려서 큰마음을 먹은거였다.

 2주에 한 번 있는 은찬의 비번 날, 모처럼 가족들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은찬은 가게 일과 프랜차이즈 일, 바리스타 교육을 받는 걸로 정신없이 바빴고, 은새 역시 오디션에 합격한 뒤로 매일 밤늦게까지 춤과 노래를 연습하느라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가족의 화복을 위해 외식을 하기로 날짜를 정해둔 것이다.

 엄마와 아저씨는 요즘 정말 부부처럼 보인다. 서로 위해 주고 챙겨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자신이 노력한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좀 서운하기도 하지만 한결과 같이 있을 대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그 기분을 충분히 알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가족이 단란한 식사를 했다. 식당을 나오는데 은새가 앞서며 말했다.

" 나 먼저 갈게. 약속 있어."
" 선기 만나러? 매일같이 붙어 연습하면서, 하루도 안 보면 못 참겠어? 으이고,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니까."

 은새가 말문을 터줘 은찬도 한결 쉬웠다.

" 나, 나도……."

 구씨 아저씨가 안 계셨으면 엄만 혼자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셔야 했을 것이다. 새삼 아저씨께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은찬은 약속 시간에 맞추려고 지하철역으로 뛰었다. 그런데 코앞에서 그만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그게 모두 이 펄럭이는 스커트 탓이다. 다음 지하철을 기다려 탔는데 세 역을 앞두고 약속 시간이 다 돼 버렸다. 또 늦었다고 그가 핀잔을 줄 게 뻔했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휴대폰이 말썽이었다. 두드리고 흔들고 사방으로 돌려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놀이공원은 인산인해였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를 찾아 헤매느라 땀이 뻘뻘 났다.

" 야!"

 지쳐 헉헉거리던 은찬은 코앞에 나타난 스니커를 보고 머리를 들었다.

" 아! 드디어 만났다."

 은찬은 숨을 몰아쉬며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화가 잔뜩 난 한결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 도대체 지금 몇 시냐!"
" 미안해요. 진짜 쏘리. 오는데 지하철을 놓쳐가지고…… 그래서 열라 뛰었다니까요. 나 땀난 거 봐요. 아우, 체력이 예전만 못하네. 요즘 통 운동을 못했더니……."
" 그러면 휴대폰이라도 켜놔야 될 거 아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데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거야!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야지! 안 늦는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는,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 거, 걱정했어요? 뭘 걱정하고 그래요. 지하철 사고라도 났을까 봐? 나 멀쩡해요. 멀쩡하게 왔으니까 화 풀어요."
" 전화긴 왜 꺼놨어."
" 아, 이놈의 휴대폰. 지하철에서부터 또 말썽인 거예요. 어휴, 이게 또 먹통이어 가지고……."

 은찬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손바닥으로 툭툭 치는데 한결이 홱 빼앗아 갔아. 그러더니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 터지지도 않는 전화기 뭐 하러 갖고 다녀!"

 그것도 부족해 두 조각 난 전화기를 발로 쾅쾅 밟아 문대었다. 오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모여서 구경했다. 깜짝 놀랐던 은찬도 포기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보다가 씩씩거리는 한결을 보고 말했다.

" 이제 화 좀 풀렸어요?"

 한결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 그래."
" 그럼 나 좀 봐요."

 기껏 차려입었더니 헐레벌떡 뛰어오는 바람에 엉망이 돼버렸다. 은찬은 후닥닥 옷과 머리를 정리하고 그에게 자세를 취했다.

" 오, 치마를 입으셨군."
" 드디어 내가 보여요?"
" 근데 좀 작은 거 아니냐? 옷 좀 사야겠다, 너."

 은찬이 홱 째려보자 한결이 씩 웃으며 말했다.

" 예뻐. 예쁘다."
" 미스 월드보다?"
" 미스 월드? 아! 야, 너 그거 걸렸구나? 응?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한결은 껄걸 소리 내 웃다가 손가락으로 은찬의 뺨을 톡톡 쳤다.

" 야, 그때 나 재미없었어. 걔들 기억도 안 나."
" 치이, 누굴 바보로 아시나? 그때 입이 귀에 걸려서 사람을 도로가에 떨어뜨려 놓고 쌩 가더구먼."
" 그때부터 네가 예뻐 보였다니까. 사내자식이 예뻐 보이는 거 얼마나 골 때리는 줄 알아? 그때 내속 끓인 빚 갚으려면 너 나한테 애교 200번 떨어야 돼."
" 누가 속을 끓였다고요? 금시초문인데요."
" 이 몸이 포커페이스라 그렇지. 마음 따로 표정 따로인 게 우리 집안 특기거든."
" 됐네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은찬인 먼저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어 따라온 한결이 은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손으로 가리켰다.

" 저거부터 타고 먹자. 옛날부터 한 번 타보고 싶었어."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과 뒤섞여 놀이 기구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화사한 꽃길을 거닐었다. 때론 깍지를 끼고 때로는 어깨동무를 하고 때론 마주 보며…….

 놀이공원에서 나온 후 높은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발코니처럼 조금 튀어나온 공간에서 바나나 모양의 노란 가죽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며 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야경을 보았다.

" 머리, 계속 기를 거야?"

 한결이 은찬의 길어진 머리에 입을 맞추며 물어다. 은찬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 그럴 건데, 왜요? 싫어요?"
" 싫다기보다, 커피프린스 컨셉트랑 안 맞잖아. 거긴 프린스들의 공간이란 말이야."
" 그럼 내가 계속 남자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

 은찬이 쳐다보며 묻자 한결이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딴 놈들한텐 그렇게 보여야지. 그래야 접근을 안 하지."
" 별 걱정을 다 하셔요. 내 주위에는 다 여자들뿐이에요."
" 여자들도 너무 붙여주지 마. 그리고 너 아까 보니까 진짜 운동 부족이더라. 내일부터 나랑 우리 클럽에 같이 다니자."
"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요즘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데. 거기 동이식품에 봉 실장님 있죠? 얼마나 빡빡한지 몰라요. 무슨 회의를 매일 하자고 하는지. 기획안을 몇 번이나 수정하고……."
" 봉 실장 매일 만나? 그 양반 안 되겠네. 사람 바꿔야겠다. 나도 매일 못 보는데 약 올라서 못 봐주겠다."
" 그건 오버고, 아저씨."
" 커피프린스 일을 줄여. 전부터 생각한 건데 새로 직원 뽑고 넌 매니저 해. 그래야 프랜차이즈 일에 더 신경 쓸 수 있어."
" 음……. 사장님이랑 얘기해 볼게요."

 둘은 서로에게 기댄 채 야경을 보았다. 이따금씩 한결이 은찬의 어깨를 힘주어 안았다. 그리고 이따금씩 머리에, 관자놀이에, 그리고 뺨에 키스를 하며 애정 표현을 했다.

"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나 병원에 실려가기 전까지 정말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어요? 혹시나 얘 여자 아닌가 하는 생각 든 적 없어요?"
" 어땠을 거 같아?"
" 음, 1번."

 은찬이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 한 번도 없다. 2번, 한 번 정도는 의심했다. 3번, 무의식에서는 의심해 봤으나 의식적으로는 생각 안 했다. 왜냐면 겁쟁이니까. 4번,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몇 번 이에요?"
" 글쎄, 보기가 좀 빈약한데…… 특히 3번은 영 맘에 안 들어. 답은 5번."
" 5번?"
" 남자여도 좋다."
" 에? 그게 뭐예요? 헉! 그럼 그때 밸런타인데이 때 나한테 키스한 거, 그거 장난만은 아니었던 거예요?"
" 그러게 내가 여자한테 보이기 싫은 부분이라고 그랬잖아."
" 맞아. 그게 뭐예요? 키스하는 걸 보이기 싫었단 거예요? 나 키스할 때 눈 안 떴는데?"
" 그게 아니라……. 그건 일종의…… 그……."
" 그 뭐?"
" 꼭 들어야겠냐?"
" 나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
" 그게…… 성욕 같은 거야."

 은찬은 놀라서 휙 머리를 돌려 한결을 쳐다봤다. 한결이 이씨, 뭘 쳐다봐 하는 표정으로 은찬의 머리를 잡아 다시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 남자인 줄 알았으면서 그걸 느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혀를……."
" 그랬다고."
" 설마……. 변태 배추벌레!"
" 그래, 할 말이 없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3번도 맞는 거 같다. 네가 여자면 가게에서 쫓아내야 되고, 이 몸의 매력보다 내 배경이 욕심난 거 아닌가 의심하고 밀어냈을지도 모르지."
" 자아도취."
" 그건 아니고. 니 말대로 겁쟁인가?"
" 늦었어요. 12시가 다 됐어."
" 보기를 주지."
" 네? 질문도 없이?"

 한결은 손가락을 세워 은찬의 눈앞에 보이며 번호를 꼽았다.

" 1번, 오늘 나랑 같이 잔다. 2번, 나랑 동이호텔 S11호로 간다. 3번, 나랑 내 침대에서 밤새도록 얘기한다. 4번, 나랑 평생 같이 산다."

 은찬은 마지막까지 듣고선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못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와 얘기해 보진 않았지만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의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실지 고민한 적도 있다. 결론은 언제나 깊은 한숨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행복에 감사하고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와 함께 하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기억하며 아끼지 말고 맘껏 누리자고 말이다.

" 자, 몇 번?"

 그러면서 한결이 뺨을 내밀었다.

" 뭐예요?"
" 뽀뽀로 대답하라고."
" 사람들이 봐요."
" 빨리 해. 안 그러면 가슴 만질 거야."

 은찬이 쿠션으로 한결의 머리를 퍽 쳤다.

" 어유, 이 에로 아저씨!"

 한결은 머리를 흔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꿋꿋이 뺨을 내밀었다. 은찬은 눈을 흘기다 하는 수 업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세 번째에서 멈췄을 때 그가 돌아봤다.

" 3번이라고? 3번이 뭐였지?"

 그가 좀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은찬을 보았다.

" 내가 이런 시시한 프러포즈에도 대답을 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은찬이 손을 뻗어 한결의 머리를 잡았다.

" 아저씨가 나 없으면 심심해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봉사하죠."

 은찬은 웃으며 다가가 한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곧 입술을 떼자 그가 덮쳐들었고 은찬은 그의 기운에 못 이겨 소파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은찬의 위에서 한결이 웃고 있었다. 손으로 은찬의 뺨을 쓰다듬으며 놀리듯 말했다.

" 보들보들하다, 보들이."
" 빨리 비켜요. 종업원이 봐요."

 한결은 일어나려는 은찬의 어깨를 누르며 입술을 내렸다.

" 적응해. 난 다른 사람들 눈을 신경 안 쓰니까."

 키스하는 그를 말려야 할까? 하지만 눈 감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걸. 적응해야지 뭐. 평생이라는데…….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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