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에스프레소-사장에게 대드는 용기를 주는 커피
얼굴이 셔츠 색깔처럼 붉어진 사장은 화를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몰라서 계속 격양돼 있었다. 뻥튀기라도 줘서 부서트리게 하거나 풍선 몇 개 터트리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지간히 다혈질인 모양이다. 이러다 사람 하나 골로 보낼 것 같아서 적십자가 돼주기로 했다.

“아, 눈이야. 이러다 짝눈 되는 거 아닌가.”
“시끄러. 입 꾹 다물고 있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아니, 내가 맞았는데 아저씨가 왜 그렇게 화를 내요? 그 남자가 백번 잘못한 거긴 하지만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야! 이 새끼야! 해결할 수 있단 놈이 너구리 눈깔이 되냐!”
“아이, 참. 아저씨가 뭘 모르셔서 그런데요. 우린 함부로 돌려차기 같은거 하면 큰일 나거든요.”
“놀고 있네. 너 똑바로 말해 봐. 태권도 사범 그거 뒷구멍으로 됐지. 몸 팔아 된 거 아냐?”
이 아저씨가 정말! 어우, 참자, 참아. 아니..... 못 참아!
“어따 몸을 팔아요. 팔기는!”
“기분 개떡이니까 엉기지 마, 자식아!”
그래도 기분이 좀 가라앉기는 했는지 아까보다는 한결 혈색이 좋아졌다. 하지만 기분이 왜 개떡인지, 왜 그렇게까지 성질을 부렸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원래 성질이 개떡 같은 것 같지만.
“괜찮아?”
“네”
“괜찮기 뭐가 괜찮아. 내일이면 뽀얀 얼굴에 멍이 주먹만 한게 생길 건데. 오픈이 다음 달이길 망정이지. 그 꼴로 잘도 장사하겠다.”
쳇. 난 또 나 걱정하는 줄 알았네. 결국 자기 장사 걱정이구먼.
“맞받아칠 입장이 못 되면 피하기라도 해야지. 태권도 사범중에 너처럼 터지는 놈은 내가 처음 본다.”
“태권도 사범을 몇 명이나 아는데요?”
“한 명”
“쳇”
“키도 작고 다리도 짧고. 참 갑갑하다. 그러고도 너한테 배우러 오는 애들이 있냐?”
여자로선 큰 키에 든다고요!
“씨이.”
“뭐. 씨이? 이게 어따 대고....”
“신체 비율상으로 긴 다리라고요. 이거 왜 이러세요.”
“참 길기도 하다. 내 다리 반 토막도 안되는게...”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전화벨이 사장을 살렸다. 아니면 오늘 뉴스에 나오게 하려고 했는데. 쳇.
“누구야?”
매너하고는. 원래 이렇게 전화를 받는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니 형님이다]
“한규 형?”
[짜식. 쫄긴. 나야, 나]
“에이씨! 너 죽을래!”
친구들 하고는. 하나같이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차 안으로 전화기에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히 거슬리는 웃음소리다.
“또 무슨 수작하려고 전화질이야? 나 바빠”
[아무리 바빠도 안 날아오고는 못 배길 거다]
“안 속아, 자식아. 끊어.”
[야, 야! 미스 월드라니까]
“뭐? 이제 별...진짜야?”
[올 라이브다. 승수 자식이 아는 후배라는데 작년에 미스 월드 대화 나갔단다. 친구들 데리고 온댔으니까 잽싸게 튀어 와. 인마.]
“어딘데?”
[승수네 별장.]
“뭐? 제주도?”
[야, 끊기 전에 잘 생각해. 쭉쭉 빵빵에다 학구적이란 말이야]
“....”
[올 거지?]
“몇 시 비행기라고?”
되어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은찬은 너무 기가 막혀 입이 쩍 벌어졌다. 전화를 끊고 갓길로 차를 대는 사장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뭐 이런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다 있단 말인가!
“야, 내려.”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눈만 끔벅거리니까 아예 차 문까지 열어준다. 이놈의 사장을 그냥 확!
“택시 타고 가.”
“네?”
“버스 타고 가든지.”
“점심은요?”
“네가 알아서 먹어.”
“아저씨! 아, 아저씨!”
은찬은 매정하게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멀어지는 차를 보고서 아무리 악을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배만 더 고플 뿐. 은새가 꿈을 가지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홰 하필이면 하늘의 뜬구름 같은 가수일까. 한탄이 안 드는 게 아니다. 친구들의 돈으로 노래 학원에 등록할 정도로 열정이 있구나.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미리 말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함숨이 나오고 만다. 어쨌든 은새는 처음으로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 같고, 엄마는 다시 활기를 되찾아 오늘도 장시간 정성을 들여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든다. 너무 맛있는 그것이 손바닥 만큼밖에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은찬은 고물 자전거를 질질 끌어다 놓고 계단을 올랐다. 씻고 아침을 먹고 다시 나와 시장 상인들한테 커피를 돌렸다. 벌써 3년째이므로 단골들의 커피 타임. 커피 기호 정도는 완전히 꿰고 있다. 모닝커피를 돌리고 돌아오던 길에 고깃간 구씨 아저씨를 만났다.
“젊은 게 좋긴 좋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밤탱이가 돼 있더니 아주 싹 빠졌네.”
“뭐니 뭐니 해도 살코기가 최고예요.”
“계집애가 쌈질이나 하고 잘한다. 너 키우는 동안 네 어머니 속이 얼마나 썩었을지 짐작이 간다.”
“말했잖아요.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니까요. 뭐 어쩌고 할 새도 없었어요.”
“승경이가 계란 한 판 사 왔다며?”
“계란으로 떡을 치게 생겼어요. 태원이 자식은 사범이 얻어 터지고 다닌다고 창피해 죽겠대요. 그 녀석하고는 끝까지 안친해지네. 정말.”
“네가 승경이를 너무 붙이니까 그렇지.”
“예?”
“하여간 자식. 눈치가 메주라니까. 태원이가 승경이 좋아하잖아.”
“그건 저도 알죠.”
“근데도 와 닿는 게 없어? 승경이가 너 좋아하는 건 알고?”
“그것도 알죠. 그게 뭐.....에! 설마 질투? 초등학생인데?”
“요즘은 유치원생들도 커플링 주고받는다더라.”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난 성인이라고요. 그리고...아니 이건 말도 안돼. 아저씨. 나 여자잖아요.”
“내 말이. 계집애가 계집애 같아야 말이지. 근데 야. 너. 거기 커피프린스에 취직했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셨대요?”
“어쩌려고 그래? 거기 새로 들어온 주인이 아주 이상한 놈이라고 하더라. 무슨 꽃미남 프로젝트인가 그렇다며?”
구씨 아저씨가 커피프린스의 아저씨랑 가끔 만나는 술친구라는 걸 깜빡했다.
“우리야 네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대해왔지만 거긴 안 그럴 거 아냐. 커피는 아무래도 여자가 마시니까. 잘생긴 놈들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전략인 거 같은데 말이야.”
“아. 그렇구나!”
“바보 도 터지는 소리 하지 말고. 어쩌려고 그러냐?”
“버텨보려고요.”
“그러다 들키면?”
“설마 고소야 하겠어요?”
“배짱 한번 좋다. 아무리 네가 남자 골격에 볼륨 없는 억울한 몸매라고 하더라도 언젠간 들통 나게 돼 있어. 남자 여자는 분명히 다른 거야. 어딘지는 묻지 마라. 너 보면 헛갈리니까.”
“아저씨 몸 보면 안 헛갈리는 줄 아세요? 남녀 구분을 뱃살로 하나요? 아니면 장딴지까지 처진 엉덩이?”
은찬이 지지 않고 말을 내뱉자 칼이 도마를 퍽퍽 찍어댔다. 은찬은 한 걸음 물러나 가벼운 투로 말했다.
“홍 사장 아저씨도 1년 동안이나 몰랐어요. 그것도 제가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거 보고 난릴르 피우시다가 알게 된 거 아니에요. 화장실만 조심하면 돼요.”
“심히 걱정된다. 걱정돼”
“시간당 5천원 이에요. 5천원. 그런 알바가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비밀 엄수하세요.”
“그렇게 주고 그게 남아? 홍 사장은 저 혼자 해도 월세를 못내서 아주 피똥을 싸더구만. 커피 장사해서 얼마나 남는다고 코딱지만 한 가게에 아르바이트생을 넷이나 써? 거기다 홍 사장까지 있으라고 했다던데. 인건비로 나가는 게 월 얼마야. 그걸 어떻게 다 감당하나? 보나마나 한 달도 못 가 끝날 거다.”
“아저씨. 지금 죽 쑤라고 고사 지내시는 거예요?”
“야, 그게 아니라....”
“아, 몰라요. 아침부터 괜히....”
“야, 그냥 가면 어떡해? 국거리 좀 줄게 가져가.”
“됐어요.”
“삐쳤냐?”
“제가 애예요?”
“여잔 원래 잘 삐치는 거야.”
“그런 편견을 버리세요. 그러니까 장가를 못 가시는 거예요. 근데 고기는 왜 주시는 건데요?”
“어, 그냥. 야, 어머니 좀 잘 챙겨. 요즘 봄 타시는지 얼굴이 영 까칠하시더라.”
“걱정 마세요. 우리 엄마 피부는 제 피부보다 더 고우니까.”
고기를 받아오면서도 머릿속에는 끝날 거란 말이 걸려서 마음이 무거웠다. 집에 와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 봐도 구씨  아저씨 말이 맞는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다. 더구나 사장이 산 턱도 없이 비싸기만 한 커피 잔이나. 곧 작업에 들어갈 최고급 인테리어 비용까지 따져보면 이건 개점 폐업. 그 말의 표본을 제대로 보여줄 것 같다.
도대체 사장은 무슨 꿍꿍이일까? 생각이란 게 있기나 한걸까? 본디 고민과는 거리가 먼 은찬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빨리 사장을 만나 물어보고 싶은데 사장은 계속 보이지 않았다. 이것저것 지시만 잔뜩 해놓고 홍 사장과 둘이서 사라져 버렸다. 커피프린스의 맛을 찾기 위해서라나? 시간당 5천원짜리 아르바이트 직원 넷이 모여 개점에 맞춰 뿌릴 전단지 내용을 구상했다. 은찬이 물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아르바이트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돈이 있으니까 벌인 거겠죠. 또 계획이 있으니까 투자하는 거고. CPU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던데. 설마 그 계산 없이 넷이나 뽑아놨겠어요?”
낙균이 말했다.
“CPU? 그게 뭔데?”
은찬이 묻자 낙균이 제 머리를 두드렸다.
“머리? 그렇게 똑똑해 보이지도 않던데.....겉멋만 잔뜩 든것 같고.”
“울 사장 차 못 봤어요? 그게 몇 억짜린지 알아요?”
“억?”
“아, 울 사장 입은 그 휴고보스 가죽 재킷 한 번 입어봤으면 좋겠다. 시계는 좀 노땅들이 차는 거고. 하여간 구두에 지갑까지 죄다 명품인 걸 보면 이까짓 가게에 퍼붓는 돈은 완전 껌 값일 꺼야. 이런 코딱지만 한 가게는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거지. 아마 공기놀이하는 것 정도로 생각할 걸.”
노랑머리 하림이 말했다. 아무리 미운 말을 해도 귀여운 녀석이다. 선기는 오늘도 말없이 카리스마를 마구 내뿜으며 커피를 시음하고 있다. 그게 오늘의 임무이기도 하다. 사장이 블렌딩해 놓고 간 커피를 시음해 보고 맛을 평가하는 것이다.
“껌 값? 너희 동네 껌은 황금으로 만들었냐?”
“울 사장한테 그렇단 말이지. 언제 내 껌 값이라고 그랬어?”
“그럼 그 껌 값으로 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우리는 뭐라는 거야? 껌 종이냐?”
“물어볼 거 뭐 있어. 시다바리지. 넌 뭐 네가 엄청 대단할 일하는 줄 알았냐? 자식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그것도 모르냐?”
“너나 시다바리지. 우린 종업원이야. 일정한 노동을 제공하고, 정당하게 대가를 받는 종업원. 우리 너같이 시시껄렁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온 게 아니거든.”
“뭐? 아휴. 관두자 관둬. 자식이 완전 앞뒤가 꽉 막혀가지곤.”
하림과 낙균이 심상찮은 분위기로 티격태격하는 동안에도 은찬은 제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그럼 괜찮을까?”
사장이 그렇게 돈이 많다면야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 으리으리한 호텔방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이 커피집은 심심풀이일지도......
“참, 이거 한번 볼래요? 우리가 어제 가서 찍은 건데, 형은 어느 게 마음에 들어?”
살가운 하림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하림과 선기가 모델이 되어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둘 다 뭘 입어도 어울리는 게 정말 모델 같았다. 은찬은 사진을 보며 살짝 한숨을 삼켰다. 괜히 찔려서다.
꽃미남 프로젝트인지 뭔지 거기에 내가 끼어도 되는걸까? 사실은 키도 모자라고, 얼짱 된 사진도 다 은새가 표샵한 건데, 쩝.
고용 인력을 효울적으로 활용하여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에게 주인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게가 제 가게인 양 생각하게 하는것. 그러기위해선 매출의 내용을 투명하게 하고 나아가 경영에 참가할 수 있도록 대화의 창구를 활짝 d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생각에 기본을 둔 한결을 열성적으로 의견을 내놓는 커피프린스의 아르바이트 직원들을 보며 뿌듯했다.
“글세 빨강은 너무 눈에 띈다니까. 화이트가 제일 나아. 무난하잖아”
“에이, 아저씨 뭘 모르신다. 인테리어 분위기도 완전 차분하니까, 우리가 눈에 띄어야 한다니까요. 사실 커피 맛은 거기가 거기 아니예요? 사거리에 스타나 시애틀의 브랜드 인지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 다른 걸로 공략을 해야죠. 사장님이 우릴 뽑은 것도 인물 덕 좀 보자 이거잖아요. 안그래요, 사장님?”
“면상만으론 안 돼. 그럴 바에는 마네킹을 쓰지.”
“서비스가 좋아야 한다고요? 에이, 종업원이 친절한 거야 기본이죠 뭐.”
“한 가지 더, 섹스어필해야 돼.”
“예에?”
“자꾸 오고 싶게. 그래야 니들 뽑은 보람이 있지. 자,계속하자. 낙균이는 어떤 컬러가 좋아?”
“전 블랙이나 화이트요. 깨끗한 게 좋습니다.”
“선기는?”
“전 뭐 아무거나......”
다들 개성대로다. 고은찬은 핑크라고 하지 않을까? 고은찬이 핑크 셔츠를 입으면 솜사탕 같을 것이다. 한결은 혼자 상상하다 웃고는 뜨끔했다. 밸런타인데이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고기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고은찬.”
일제히 끄트머리에 앉은 은찬에게 시선이 쏠렸지만 녀석은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입 안 가득 삼겹살을 쑤셔 넣고선 눈만 멀뚱멀뚱 뜨고 쳐다봤다. 혼자서 벌써 몇 인분을 먹고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 저 녀석 먹는걸 어떻게 감당할까? 차라리 소를 키우는 게 낫지 싶다.
“예?”
“됐다. 그냥 먹어라. 우리끼리 정하자. 레드는 하림이 뿐이지?”
그러자 하림이 우적우적 먹고 있는 은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녀석은 뭔지도 모르고 고추 든 손을 들었다.
“오케이, 두 명. 그럼 화이트.”
홍 사장에 이어 낙균이 손을 들자 선기까지 손을 들었다. 통 얘기도 없고 의사 표시도 잘 하지 않는 놈이 손을 든 건, 레드는 정말 싫다는 거겠지.
“에이, 빨강이 좋은데. 다들 너무 소심하다. 사장님, 나 혼자 빨강 입을게요.”
“꼭 입고 싶으면 입어.”
“어, 정말요?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 있어. 학교도 아닌데. 참, 너 학교는 어디랬지?”
“재수한다잖아요. 낙균이는 휴학 중이고. 선기는 뭐 한다 그랬지?”
“그냥......”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다들 자기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전화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선이 은찬에게 모아졌다.
“형, 전화.”
“응?”
한 손으로 쌈을 입 안으로 넣으면서 휴대폰을 꺼낸 은찬은 보지도 않고 전화기를 꺼버렸다.
“누군데 안 받아?”
“쟨 먹을 땐 전화 안받아요.”
홍 사장이 설명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다.
“어서들 먹어요. 은찬이 싹 쓸어가기 전에. 사장님. 술 한 잔 받으시죠.”
한결은 잔을 내밀어 소주를 받았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잔을 돌렸다. 다들 넙죽넙죽 잘 받아 마시는 편이었다. 선기는 고기도 별로 먹지 않으면서 사양 없이 술을 받았고, 하림은 두 잔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머리가 더 노랗게 보였다. 낙균은 술잔을 깍듯하게 대하는 자세가 제법 어른스러웠다.
“아저씬 결혼하셨어요?”
“애가 둘이다.”
하림은 소주 석 잔에 취했는지 말이 많아지고 웃음도 헤퍼졌다. 사내자식이 애교도 많은 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
“사장님의 아직 안 하셨을 거고, 애인은 있으세요?”“왜, 소개라도 시켜주게?”
“에이. 사장님 정도 킹카면 쭉쭉 빵빵한 여자들이 줄줄 따라 다닐걸요? 맞죠?”
“그런 거 안 키워. 나무 하나도 못 키우는데 여자를 어떻게 키워.”
그때 고은찬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여기 솥뚜껑 좀 바꿔주시고요. 삼겹살 3인분 추가요. 김치도요.”
불판을 교체하고 고기가 익는 동안 은찬은 물김치를 후루룩 마셔댔다. 보다 보다 저렇게 잘 먹는 놈은 처음 본다.
“어, 그거 안 먹을 거야?”
“예? 이거 떨어진 건데.”
“괜찮아. 줘”
심지어 상 위에 떨어진 고기까지 먹어치웠다. 그때 하림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어!”
고기 한 조각을 방바닥에 떨어트렸다.
“에이, 버려야겠네.”
귀신같이 들은 은찬이 젓가락을 내밀었다.
“야, 그걸 왜 버려. 아깝게. 이리 줘, 불판에 다시 구워 먹어야지.”
하림이 킬킬 웃으며 고기 조각을 건냈다. 그러고는 계집애를 여럿 녹일 것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속닥였다.
“보셨죠, 사장님. 저 형은요, 땅에 떨어진 거 빼놓고 다먹나 봐요. 오늘 낮에 자장면 곱빼기를 시켜 먹었는데 선기가 좀 남겼거든요? 근데 그걸 삭삭 긁어서 끝까지 다 핥아먹더라니까요. 하여간 저렇게 비위 좋은 사람은 처음 봤어요.”
다들 신기해하며 은찬을 쳐다보자 홍 사장이 말했다.
“수학여행 가서 혼자 살아남은 애야. 쟤가. 꼬막 먹고 다들 식중독에 걸려서 병원 신세를 질 때 혼자 멀쩡하게 돌아온 전설적인 놈이 바로 고은찬이야. 지 친구들은 병원에 누워서 죽도 못 먹네 어쩌네 하는데, 저 놈은 밥솥에 밑반찬 쏟아 넣고 쓱쓱 비벼서 밥 한 솥을 다 해치웠다니까.”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킬킬대며 웃는 하림에게 한결이 말했다 .
“앞으로 잘 감시해 봐. 혹시 커피 잔 같은 거 먹나.”
배를 잡고 웃는 하림 옆에 낙균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선기는 역시 무표정한 채로 소주만 비우고 있었다. 그게 노선기를 뽑게한 매력이긴 했다. 말이 없지만 숫기가 없어 보이지 않고, 웃지 않아도 차가워 보이지 않고, 말끄러미 쳐다봐도 속을 알수 없는 놈. 처음 본 순가 매력적인 놈이다 했다. 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매력적인 놈이다 했다.
“얘 왜 이래? 야, 너 몇 잔 마셨냐?”
“아이, 아저씨.”
쪽! 다들 기겁을 하고 놀랐다.
“어, 이놈이! 어따 입술을 대고 난리야? 야!”
홍 사장이 손으로 뺨을 닦는 동안 다들 동작을 멈추고 하림이 하는 짓에 놀라 있었다. 근데 하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히죽이죽 웃으며 옆으로 기어갔다. 낙균이는 만만한 놈이 아니다 싶었는지 선기에게 달려들었다. 선기가 가슴팍을 밀어내도 소용이 없었다. 기어이 머리를 잡고는 뺨에다 뽀뽀를 하고는 다음 목표를 향해 또 기어갔다.
“아, 그 자식 술버릇 한번 에로틱하네. 계집애 여럿 잡을 놈일세.”
“잡는 게 아니라 지가 잡히는 거죠. 아주 지 무덤을 지가 파요.”
은찬은 옆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쓱 다가온 하림을 복 깜짝 놀랐다. 한결은 저도 모르게 희고 뽀송뽀송한 은찬의 얼굴로 시선이 갔다. 불의 열기와 술기운에 양 볼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결은 왠지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다. 은찬에게 접근하는 하림의 머리를 확 잡아채고 싶었다.
“우웅, 형....”
“응?”
은찬이 돌아본 순간 하림이 입술을 내밀었다.
“읍!”
둘의 입술이 부딪쳤다. 모두 경악해서 쳐다보는데 하림도 놀랐는지 눈이 똥그래졌다. 한결은 그런 하림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기분 나쁘게도 화가 났다. 둘이 붙어 있는 게 보기 싫었다. 머리에선 ‘이건 아니야’라고 하는데 가슴에선 ‘그 입술은 내 거야!’ 라고 했다. 골 때리는 기분이었다.
“야, 인마!”
은찬의 화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림과 동시에 하림은 맥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은찬이 손바닥으로 하림의 얼굴을 퍽하고 친 것이다.
“아, 아파....”
“이 자식이 어따 입술을 디밀고 지랄이야! 술을 먹었으면 곱게 취할 것이지!”
“찬아.”
“왜요!”
“고기 탄다.”
그 한마디에 사건이 종료되었다. 식당 안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은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히 앉아 고기를 뒤집었다. 한결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10시가 넘어서야 한결은 일행을 이끌고 식당을 나왔다. 홍 사장과 걸으면서 앞에서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는 네 녀석들을 보았다. 밥에 소면까지 먹어치운 고은찬과, 얻어맞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마냥 행복한 진하림. 조금 느슨해져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권낙균. 여자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쳐다봐도 침묵의 오라를 내뿜고 있는 노선기. 네 녀석 다 개성이 지나쳐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처음엔 코딱지만 한 커피점 하나쯤이야 일사천리로 잘될 것 같았는데.......한결은 사거리의 한 카페로 일행을 데려갔다. 그리고 각기 다른 커피 6잔을 시켜 억지로 먹였다.
“오전에 내가 맛보라고 한 거 다  마셔봤지? 맛이 어땠어?”
“아, 그거. 은찬 형은 그것도 넉 잔이나 마셨어요. 양이 안찬다나 어쨌다나.”
대답을 가로챈 하림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배를 잡고 자지러질 듯이 킥킥 웃어댔다. 그런 하림을 한심한 듯 보는 낙균이 대답했다.
“처음 먹어봤는데.”
“응”
“좀 쌉쌀학, 떫기도 하고, 혀가 아린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선기는 전에 먹어봤어?”
“네.”
“비교하니까 어때?”
“잘 모르겠어요. 근데.”
“어, 근데.”
“제 입에는 무거운 느낌이 강해서....”
“안 맞았어?”
“그렇기 보단, 전 좀 구수한 쪽이...”
“그런 건 알아서 뭐 해요? 네, 사장님? 자꾸 커피를 마셔보라고 하시는데, 마셔보라고 하니니까 마시긴 하는데, 아르바이트생이 그런 것까지 알아서 어따 써요? 만드시는 분이나 아시면 됐지. 여기 커피 아저씨가 잘 알아서 만들어 주시겠어요? 안 그래요, 아저씨?”
하림이 해롱거리며 홍 사장 앞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인마, 징그러. 안 떨어져?”
“야, 태권브이. 넌 어때?”
캐러멜 마키아또의 거품을 휘젓던 은찬이 고개를 들었다. 장난질하다 들킨 개구쟁이처럼 눈이 똥그랬다.
“뭐, 뭐가요?”
“에스프레소 맛이 어땠냐고”
“아, 그거 쓰던데....”
“넉 잔이나 마셨다면서 감상이 그것뿐이야?”
“독하고.......아! 잠이 안 와요.”
“뭐?”
“점심 먹고 요즘 계속 졸렸는데 그거 먹으니까 잠이 안 오던데요? 혹시 각성제 성분 같은 거 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각정 좀 했냐?”
“각성이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각성을 해요? 각성하면 삐딱이 아저.....아니 사장님이나 해야죠.”
“뭐?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던 한결은 은찬이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던지는 걸 보고서 발끈했다. 은찬이 새삼 화난다는 듯이 노려보니까 지켜보는 네 명도 이상한 눈으로 한결을 보았다. 한결은 미간을 모으며 은찬을 노려보았다. 은찬의 눈초리를 보니 발렌타인데이의 일을 암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설마 이 자리에서 그 일을 발설하려는 건 아니겠지?
“너 말도 안 되는 소리하면 죽는다!”
“툭하면 죽는대. 아무리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인권이라는 게 있는데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말을 그렇게 막 하시면.....”
“뭐야? 너 인마 자꾸 대들 거야!”
“우와, 진짜! 네가 언제 대들었다고 그래요? 누구 나 대든 거 본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 없지? 없지? 거봐요. 사장이면 다예요? 없는 말 막 만들어 내서 알바생 기죽어요 되는 겁니까!”
“야! 고만 해, 고은찬.”
은찬이 흥분해 눈이 커지느 걸 홍 사장이 말렸다.
“에이, 한참 재미있어지려는데 왜 말려요, 아저씨. 쌈 구경이 세상에서 젤 재미있는 건데.”
“이 녀석들이 말릴 생각은 안 하고.”
“자고로 그림이랑 쌈은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랬어요.”
낙균마저 실실거리는 통에 한결은 입을 다물었다. 고은찬 페이스에 말려들다 보면 체면 구기는 건 일도 아니다. 저 녀석이랑 얘기하면 화나도 짜증나기 일쑤다. 아예 대꾸를 말아야지. 한결은 카페오레를 한 모금 마시고 짐짓 사장다운 태도로 말했다.
“앞으로 홍 사장님도 공부를 좀 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신사동에 바리스타 교육 기관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장사를 계속하실 마은이 있으시면 자격증을 따놓는 게 유리할 겁니다. 사실 지금으로선 냉정히 말해 중하예요.”
홍 사장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그래도 하는 아니네요. 예전에는 먹혔는데.......10년전에만 해도 제 커피 마시려고 여대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그랬다니까. 내가 전에 얘기했지? 어, 찬이 넌 알지? 우리 마누라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해 줬잖아.”
“네. 근데 바리스타가 뭔데요?”
“그, 글쎄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어이가 없었다. 커피 사장 경력이 10년이 넘는단 사람이 바리스타를 모르다니. 도무지 공부를 안 하는구먼. 그러니 발전이 없지.
“한 번 알아보세요. 관련 책도 있을 거니까.”
홍 사장이 무안해 얼굴이 팍 굳어졌지만 한결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석 달뒤면 안 볼 사람들이니까. 또다시 본다고 해서 비위에 안 맞게 예쁜 말을 쓸 한결도 아니다.
“석 달 뒤에는 지금 매출에서 3배쯤 오를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서 사장님 드릴 테니까 그때 잘해 보세요. 요 멤버 그대로 가지고 하면 아주 망조가 안 든 이상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석 달만 장사를 하신단 거예요?”
낙균의 물음에 모두 한결을 쳐다봤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한결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한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은찬을 보았다. 비난하는 눈초리였다. 뭐야, 자꾸. 이 자식은 도대체 뭐가 못마땅 한거야?
“어떤 분이랑 내기를 했거든.”
한결은 눈썹을 찡그리는 은찬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석 달 안에 매출 3배로 만들어 놓겠다고. 그렇게 해야 조용할 것 같아서 뛰어든 거지. 니들도 그래서 뽑았고. 걱정할 거 없습니다. 홍 사장님. 매출이 3배로 뛰어도 제가 산 가격에 드릴 테니까.”
“뭐예요? 어떻게 그딴 식으로 말할 수가 있어요!”
별안간 은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뭔데 3배로 만든다는 거예요! 어떻게 아저씨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진짜 재수 없는 인간이네.”
“뭐! 식충이 너 말 다 했어!”
“야, 고은찬! 너 왜이래, 인마!”
“놔봐요. 아저씨. 놔봐! 씨이! 변태 배추벌레 같은 놈. 당신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백수였던 주제에 돈 좀 있다고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 매출을 3배로 만든다고! 그게 돈 지랄이지, 당신 능력이야! 아저씨가 당신만 못해 그런 줄 알아! 뭐, 중하! 어따 대고 중하래! 당신이 뭔데 채점을 하고 난리야! 쓰레기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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