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좋은 개는 대들지 않아
홍 사장은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의 면접을 지켜보는 중이다. 그 조건에 맞는 지원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줄줄이 몰려 들었다. 손바닥만 한 커피집의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데 2차 면접이라니?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모델처럼 쭉 뻗은 인간이 자신을 고용했다는 것이다. 커피 맛이 개떡 같다는 표정을 했으면서 주방을 맡아달란다. 그렇다면 본인은 뭐 할 건지 궁금하다. 자기소개. 돌아 봐. 웃어 봐. 개인기, 노래, 단순 명료하고 유치한 주문에 지원자들은 잘도 따랐다. 마치배우 오디션을 보는 것처럼 까다롭게 구는데도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그런것 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식이다. 어짜나 쇼맨십들이 많은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아무리 봐도 댄디보이는 이런 변두리에 테이블 7개의 작은 커피집을 운영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혹시 어느 엔터네인먼트 홍보실에서 나온 건 아닐까? 새로 사장이 될 이 남자는 명쾌하게도 그 자리에서 합격 여부를 결정햇다.
“너, 오케이.”
둘까지 뽑았을 때 어쩌려나 싶었는데 세 번째도 마찬가지 였다.
“너, 오케이”
다시 말하지만 손바닥만 한 커피집에서 종업원을 셋이나 둔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홍 사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보나마나 한 달도 못 가 문 닫겠구나 싶었다.
“홍 사장님.”
“네?”
“내일 9시에 모여서 회의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회, 회의요?”
“전체적인 분위기 컨셉트도 잡고 인테리어랑 유니폼을 어떻게 할 건지 정해야죠.”
“제가요?”
새 사장은 무슨 멍청한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홍 사장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얼빠진 질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새 사장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손바닥만 한 커피집 인테리어를 하는데 무슨 회의? 사장이 저 원하는 대로 그냥 업자랑 알아서 결정하면 되는 거지.
“아르바이트생 4명이랑 같이요. 이제 알아들으셨어요?”
“아, 네. 그, 근데 4명이요? 아까 세 명 뽑는 것 같던데....”
“고은찬 있잖아요.”
“예? 걔가 한답니까?”
홍 사장은 며칠 전 두 사람이 부딪쳤을 때를 상기했다. 가게를 이 남자에게 팔았다고 하자 은찬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펄쩍 뛰면서 있는 대로 욕을 하고 나갔다. 본인이 듣는 데서 변태라느니. 끔찍한 인간이라느니, 꿈에 볼까 무섭다느니. 그렇게 치를 떨며 싫어하는 얼굴은 처음 봤을 정도다. 근데 이 사람 밑에서 일을 한다고? 어림없을 텐데.
“키는 좀 작아도 여자들한테 먹히는 얼굴이니까 써먹어야죠. 며칠 지켜보니까 여긴 주로 2,30대 직장인들의 통행이 잦더군요. 커피집에 앚아서 커피 마시는 건 대부분 여자니까, 주 고객을 2, 30대 여성으로 봐야겠죠. 주 고객층이 선호하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느 젊고 잘생긴 남자 종업원. 이게 딱 먹혀요. 고은찬도 꽤 먹힐 거예요. 메트로섹슈얼하니까.”
어허. 고은찬을 설마 남자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걔 안 하려고 할 텐데....”
“로또 당참 됐대요?”
“그, 그런 소문은 못 들었는데요.”
“그럼 잔말 말고 나오라고 하세요. 근로 청년이 뭘 마다해요. 정 안 나오겠다면 내가 노예 계약서를 아직 갖고 있다고 하세요.”
“예에?”
노예 계약서? 신체 포기 각서랑 비슷한 건가? 그렇다면 이 남자는 사채업자?
“걔가 거기도 빚졌어요? 으이고, 그 자식 신세도 참.”
홍사장은 어떻게든 은찬을 감싸주려 했다. 돈 못 갚는다고 애 장기라도 빼가겠다면 큰일이다.
“이, 이번에는 누가 또 말썽을 부려서.....쯧쯧. 엄마랑 동생이 번갈아 가면서 애 등골을 빼먹어요. 빼먹어.”
“걔가 고3때부터 제 집안 가장 노릇 하고 있잖아요.”
홍 사장의 말에 한결이 미간을 모으며 쳐다봤다.
“그래요? 아버진요?”
“회사 부도나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던가. 그 집 엄마가 좀 철이 없어요. 곱게 자랐는지 어쨌는지. 씀씀이가 헤퍼가지고 카드 빚이 장난이 아니었데요. 동생이 또 지 엄마를 꼭 빼닮았잖아요. 애가 그 사이에 끼어갖고 엄마 보살피랴, 동생 뒤치다꺼리하랴. 또 지 밥벌이하랴, 아주 허리가 휘어요. 애들 태권도 가르쳐서 겨우 밥 먹고 사는 앤데,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쳐대니까 돈이 모일 새가 없난 봐요. 쯧쯧.”
“친척도 없답니까?”
“물어보진 앟았는데. 그렇겠죠 뭐. 그러니까 애 혼자 고생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아무튼 잘 좀 봐주세요. 빚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떼먹고 그럴 놈은 아니니까.”
“그 자식이 진짜 태권도를 가르쳐요? 야식 배달하는 게 아니라?”
“야식 배달이요? 그거 한단 얘긴 안 했는데. 뭐 할수도 있어요. 애가 워낙 부지런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까. 새벽에는 우유 배달도 하고 시장에서 커피도 팔고 그러잖아요.”
“그럼.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네요.”
“아마 그럴걸요. 자식이 워낙 털털해서 가리는게 없어요. 도둑질만 빼고 다 할 겁니다.”
“도둑질이라고 못하겠습니까?”
“에이, 무슨 말씀을. 절대 그런 애는 아니에요.”
“사람 속은 모르죠. 암튼 내일 나오라고 하세요.”
한결은 커피프린스를 나와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 아버지의 호출이다. 남자랑 어쩌고 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과연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아버진 불같이 호통 치셨고 눈치 빠른 어머니는 어처구니없는 꾀에 기가 막혀 하셨다. 어쨌든 고은찬 덕분에 줄기차게 들어오던 맞선은 꼬리를 감추었다.  뭐. 변태 배추벌레? 자식이 누군 안 징그러웠던 줄 아나! 한결은 그때가 다시 생각나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미친 짓이었지. 그게 왜 들어가냐고. 젠장! 딕도 혀는 안 넣었다고 새끼야. 근데 그게 어디라고 들어가, 들어가길. 제기랄! 고은찬이 놀랄 만도 했다. 인정. 그러니까 갖은 욕설을 퍼붓는 걸 가만 놔뒀지. 아니었으면 그때 밖에서 지랄을 할 때 한 대 쳐버렸을 것이다. 한결은 음악을 크게 틀었다. 지금은 이런저런 생각할 때가 아니다. 할머니가 무슨 제안을 하셨는지 안 아버지의 분노를 받아내야 할 시간이다. 3개월 안에 매출 신장 300%. 그 얘기가 나온 건 열흘 전이다. 열흘 전, 할머니께서 코딱지만 한 커피집을 하나 찍으면서 말씀하셨다. 간판이 커피프린스다.
“저거 석 달안에 3배로 키워놓으면 니 멋대로 해. 네가 다시 농구를 하든, 평생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다니든 아무 말도 안하마.”
“이 나이에 농구는 무슨.”
“대신 매출 못 올리면 회사 들어오는 거다. ”
“아버지는 어쩌고요?”
“내가 말하마”
“정말이에요? 다 막아주실 거예요?”
“쯧쯧 호랑이 새끼가 왜 이렇게 겁이 많누. 할 거냐. 말거냐?”
“차는요?”
“일하려면 필요하겠지”
“안 사주시면 주식 확 팔아버릴 거예요.”
“아서라, 난 내 손자가 지 아버지한테 맞아 죽는 꼴은 안 보고 싶다.”
“사주시면 보너스로 안마5번 쿠폰 드릴게요.”
“째째하게 10번.”
“에이, 좋습니다. 거래하죠.”
할머니가 아무 말 마라 하신다고 아버지가 가만 놔두실 리 없다는건 예상하고 있었다. 근데 정말 가기 싫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아니 지금이 더 아버지는 무서운 존재다. 지구에서 가장.....
부리나케 들어온 은찬은 낯선 청년들을 보고 주춤했다.
“어, 왔어? 이리 와 앉아.”
이건 또 무슨 상황? 은찬은 어제 오후 홍 사장의 전활르 받고부터 열이 오른 상태였다. 노예 계약서가 아직 살아있다는 얘기를 듣고 뒷골이 뻑적지근했다. 분명히 찢는다고 해놓고선 이 인간이! 그 상태 그대로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우선 설명부터 들어.”
“나 할 말 있거든요!”
“조용히 해.”
“아니, 내가 왜......”
남자가 찌릿 노려보았다.
“당신 말을.....들어야.....”
띄엄띄엄 말하던 은차은 움찔해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분위기가 전과 달랐다. 눈빛이 날카롭고 사뭇 진지했다. 전에는 노는 남자 같았는데 지금은 일하는 남자 같다. 종이를 잔뜩 들고 한 손에는 볼펜을 쥐고 있으니까 정말 바쯘 것처럼 보인다. 에이씨 뭐야!
“이 커피집의 컨셉트는 ‘악마같이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사같이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이다.”
쳇. 놀고있네.
“그거 커피네요.”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말했다. 은찬은 힐끗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뭐 이래? 이놈은 뭐야. 왜 이렇게 잘생겼어? 어우, 씨이 눈을 못 마주치겠네.
“너 이름이....권낙균. 그래, 낙균이 말이 맞다. 커피집이니까 당연히 커피가 주인공이겠지? 그 커피를 최대한 표현하는거다. 맛으로 향기로 색깔로. 또 종업원으로.”
“종업원으로?”
홍 사장마저 열심히 듣고 있었다. 은찬은 못마땅해서 팔짱을 끼고 뾰족한 시선으로 한결을 쏘아보았다. 그가 뭐라고 하든지 신경 안쓰고 맹렬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가 본체만체 해도 계속해서.....
“너희한테서도 커피의 느낌이 나야 돼. 그런 의미에서 다들기가 막히게 어울리지. 커피 냄새가 나.”
“그거 무슨 프로젝트 그룹 홍보 멘트 같은데요? 그럼 우리가 커피계의 웨스트 라이프? 아니, 이스트 라이프인가? 히히. 그럼 나는 어느 파트지? 달콤한 쪽 아니에요?”
이번에는 노랑머리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에서 굉장히 활기찬 느낌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다. 밝은 노랑머리에 눈이 엄청 크고 얼굴은 정말 작은, 은찬이 지금까지 실물로 본 남자 중에 제일 빛나 보이는 남자였다. 힘주었던 동공이 저절로 확 풀려버렸다. 생크리메 파묻힌 기분이다.
“글세, 그건 차차 본인이 찾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왜 이쪽을 보고 난리야? 씨이. 나 아직 할 말 많다고. 아저씨. 각오 단단히 해. 아저씨.
“내 느낌으로 하림인 뜨거운 쪽.”
“헤, 정말요? 전 좀 손발이 찬데.”
“느낌이 그렇다고 특히 그 머리가 마음에 들어. 말 나온 김에 이것부터 할까? 유니폼은 하람이랑 선기가 맡아줬으면 하는데. 같이 돌아보고 맘에 드는 옷 있으면 사진 찍어 와 봐.”
“우리 맘대로 정해도 돼요?”
“니들이 입는 거니까.”
“어, 그럼 비싼 거라도 괜찮아요?”
“일단 마음에 드는게 있으면 다 찍어와. 내일 보고 정할 거니까. 알았지 노선기?”
대답도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남자가 있었다. 은찬의 바로 옆자리에. 하지만 은찬은 감히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눈만 살짝 움직여 살펴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뛰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그에게서 엄청 좋은 향기가 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저 바짜기는 검은 머릿결. 아, 죽음이다! 이게 인간일까? 콧날이 예술이다. 조각이 따로 없다. 영화배우를 보명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대체 이 잘생긴 삼총사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10분 있으면 인테리어 하는 사람이 올 겁니다. 홍 사장님이 좀 만나 보시고요.”
“네? 제가요?”
“아, 낙균이도 같이. 원하는 분위기는 대충 말해놨으니까 시안을 몇 개 가지고 올 거야. 그중에서 고르면 돼. 선택은 두 사람한테 맡기죠.”
은찬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따라와.”
누구 ? 나?
“각자 일 끝나면 알아서 퇴근하고 내일 아침 9시 다시 집합. 못하겠으면 내일 안 나오면 되니까 성가시게 전화 같은 거 하지 만. 뭐해. 고은찬. 따라와.”
그러고는 바람같이 휙 나가버렸다. 다들 어리둥절해 있는데 노랑머리가 살인미소를 보내왔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고은찬이라고? 난 진하림. 반갑다.”
“어, 그래”
“인사들 하죠. 아까 들었는데 낙균이? 너는 노선기지? 다들 나이가 어떻게 돼? 난 86인데?”
“86”
“84”
“나 난83”
순간 못 믿겠다는 눈이 일제히 와 꽂혔다. 은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그, 그냥 반말해. 괜찮아.”
“찬이, 나 좀 보자.”
아저씨가 찡그린 표정으로 불렀다.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문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 안 나와?”
오늘 왜 이렇게 인기지?
“나중에 얘기하자”
그리고 아저씨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근데 너 남자냐?”
은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저씨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현실은 그런 거였다. 아르바이트생 구함의 대상은 남자였고, 그는 자신을 아직 남자라고 알고 있으며, 자시는 아직 그에게 여자라고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자 그는 번쩍이는 자동차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너무 얄미웠다. 째려보는데 2주 전그 장면이 오버랩 돼서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아저씨!”
은찬은 씩씩거리며 다가가 전투태세를 했다.
“노예 계약서라니요? 그게 왜 아직 살아 있는 겁니까!”
그는 여전히 재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담배를 휙 집어던졌다.
“아저씨! 어따 버려요?”
“그거 없다.”
“뭐라고요?”
“노예계약서 없다고. 아르바이트 할거야, 말거야?”
“안 해요.”
“왜 안 해?”
“몰라서 묻습니까? 그때 발렌타인데이 때 일 끝내면서 합의 봤잖아요. 우연히 마주쳐도 절대 모른 체하기로.....”
“그럼 모르는 사람인 걸로 하면 되겠네.”
“아저씨 밑에서 일하기 싫거든요. 아저씨 낯짝만 봐도 구역질이. 우욱!”
“그 자식 참 말 많네. 장난삼아 한 거 갖고 아직까지 툴툴대냐? 계집애처럼. 사내자식이 좀 털털한 맛이 있어야지.”
“장난이오? 혀까지 집어넣고 장난이오.”
“이 자식이! 아예 확성기를 틀어라!”
둘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댔다.
“내가 그때 그 일로 얼마나 심한 악몽에 시달리는지 알아요?”
“엄살은. 사내새끼가. 안죽어, 자식아.”
“그게 더 무서운 거죠.차라리 죽으면 악몽에 시달리지난 않지. 씨이.”
“그래, 집어치우자. 내가 너 같은 애랑 무슨.....가라. 가.”
한결이 차에 타는 걸 보고 은찬은 움찔했다. 이게 아닌데 싶었다. 지금 굴러들어 온 알짜배기 아르바이트를 발로 뻥 차버린 것이다. 도장 사정이 너무 안 좋아 시골에 가 농사나 짓겠다는 것이다. 인근에 큰 도장이 생기고부터 관원이 팍팍 줄어든게 타격이 너무 컸나 보다. 그렇다고 문을 닫다니! 지인을 통해 곧 새 도장을 알아봐 주시겟다고는 했지만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청천벽력 앞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의 줄이 내렸는데, 지금 그걸 차버린 것이다. 어우. 망할! 자좀심이 밥 먹여 주나! 에이씨!
“나 이제 날치기랑 한 패 아니에요?”
차에 타려던 한결이 동작을 멈추고 은찬을 봤다. 은찬은 시선을 피하고는 은근슬쩍 차에 탔다. 뒤이어 탄 한결이 말했다.
“감시 카메라 달 거야.”
“카운터에서 돈이라도 슬쩍할까 봐서요?”
“당근이지.”
쯧쯧. 사람을 그렇게 못 믿나?
“지금 어디 가요?”
“본차이나.”
“거기 뭐 하는 덴데요?”
“가보면 알아”
은찬은 속으로 고급 시트에 감타늘 하며 안전벨트를 맸다.
“그래서 맞선은 어떻게 됐어요? 아직도 보고 다녀요?”
“웬 관심이야?”
“궁금하니까 그렇죠. 그렇게까지 했는데 성과가 없으면 억울하잖아요.”
“네가 억울할 게 뭐 있어. 돈 받아 챙겼으면 됐지.”
“쳇. 사람을 어떻게 보고. 내가 뭐 꼭 돈 때문에 하겠다고 한줄 알아요? 조선 시대도 아닌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되는 게 안됐다 .불합리한 처사다 싶어 어떻게 좀 도움이 될까 해서....어어!”
은찬은 갑자기 차가 급제동을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옆차선에서 흰 승용차 한 대가 신호도 없이 홱 끼어든 것이다.
“에이,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아저씨, 클랙슨 눌러요!”
하지만 정작 손을 뻗어 클랙슨을 눌러댄 건 성미 급한 은찬이었다. 빵, 빵, 빠앙.
“야, 좀 가만있어 봐!”
“어, 이쪽 차선으로 넘어왔어. 와, 요리조리 잘도 파고드데. 참을 거예요 아저씨? 확 추월해 버려요!”
“좀 점잖게 몰 것이지 촐싹대긴. 어디 한번 붙어보자 그래.”
“신호 바뀌었다! 빨리! 빨리!”
한결의 쪽빛 스포츠카가 튀어나갔다. 그리고 흰색 승용차 앞을 아슬아슬하게 파고들었다. 근데 뒤에 운전자도 불이 붙었는지 차선을 급히 바꿔 옆에 바짝 붙어왔다.
“어, 그래. 해보자. 자식아!”
“어, 이! 앞에 가잖아요! 옆으로 빠져요. 옆으로!”
4차선으로 옮긴 한결의 차는 빠르게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차선을 옮겨 흰색 승용차 앞을 파고들었다.
“예쓰!”
“됐다!”
“백라이트도 못 보게 내빼주지!”
한결은 엑셀을 밟아 노란 신호에서 부리나케 통과했다. 휙 뒤를 본 은찬은 흰색 승용차가 신호에 걸려 대기하고 있는 걸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싸!”
“자식.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좋아서 차제가 뒤흔들릴 정도로 방방 뛴 그들은 하이파이브를 하고서도 기쁨을 주체 못하고 깔깔거렸다.
“그 아저씨 되게 열 받았겠다. 아, 통쾌해!”
“자식 , 그렇게 좋냐?”
“이겼는데 안 좋아요?”
“애가 어쩜 그렇게 단순하냐?”
“좋아할 일도 많다. 당연한 걸 갖고.”
은찬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한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정면만 봤다. 그렇게 15분의 침묵이 흘러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식기 전문점이었다.
“와!”
눈이 휘둥그레진 은찬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화려한 그릇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박물과에 온 기분이 들었다. 발근 조명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그릇을 보러 온 사람들은 발소리마저 죽이며 성지 순례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이, 차력! 얼빠져 있지 말고 골라봐!”
“뭐, 뭘요?”
“뭐기 뭐야 커피 잔이지.”
“아아. 근데 밥은 언제 먹어요? 배고픈데”
“이제 10시다. 식충아.”
“아침을 못 먹었단 말이에요.거의”
“거의는 뭐야? 먹었단 거야, 못 먹었단 거야?”
“김밥 한줄에 삶은 계단 두 개 먹은 게 다예요.”
“저런, 쯧쯧, 참 허기도 지시겠네요.”
“아, 우유도 한 잔 먹었네.”
잔을 들어 살펴보던 한결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비웃고는 걸어가 버렸다. 은찬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뒤를 따랐다.  다 예쁘고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데 여기서 뭘 고르란 건지. 은차에게는 너무 버거운 주문이다. 그릇 깨는 데는 일가변이 있단 걸 본인이 아는 터라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보기는 좋았지만 진열장 사이로 걸어 다니는 건 무서웠다. 한데 앞서 걷는 그는 조금도 거리낌없어 보였다. 식기를 살펴보면서 남자가 저렇게 진지한건 처음 본다.  자주 와 본 모양이네? 난 이런 매장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근데 이거 하나 깨면 얼마야? 은찬은 그가 유심히 살펴보거나 들었다 놓는 잔을 뒤따라서 보았다. 은찬 이외에도 검정색 치마 정장을 입은 스튜어디스 같은 여직원 둘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가끔 그가 뭐라고 물으면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활짝 열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은찬은 그와 두 여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떨어져 걸었다.  고급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 여기저기 그릇을 구겨하고 있고, 신혼부부같이 보이는 커플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 사이에서 뒷짐 지고 걷고 있는 은찬은 꽤 돋보이는 편이었다. 은찬은 아줌마나 젊은 여자들의 시선이 심심찮게 그에게 꽂히는 걸 목격했다. 그러다 여자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면 멋쩍은 미소를 보내곤 했다. 은찬은 못 본 척하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뭐 해? 이리 와봐.”
저렇게 새빨간 셔츠에 시커먼 넥타이 같은 걸 매고 있으니까 눈에 띄는 거지. 키나 작으면 말을 안해. 날 좀 봐주소 하는 거랑 뭐가 달라? 자기가 무슨 모델인 줄 안다니까.
“너 무슨 색 좋아해?”
“색이오? 다 좋아하는데.”
“이거랑 이건?”
“둘 다 괜찮은 거 같네요.”
“제라늄이 나아, 로즈마리가 나아?”
“어느 게 제라늄인데요?”
“됐다. 넌 가서 티스푼이나 골라라.”
결국 수저통 쪽으로 쫓겨났다. 반짝거리고 작은 티스푼들이 잔뜩 있었다. 잠깐 시선을 줬지만 고르기는 역시 역부족이다. 다 예쁘구먼. 빈둥빈둥 쳐다보다가 그것도 지루해져 그를 찾아보았다. 커피 잔을 들어 살펴보는 그의 표정이 도자기 감정사처럼 예리하고 진지했다. 의외로 꼼꼼한 모양이다. 그때 직원들이랑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궁금해서 슬쩍 옆으로 가 귀를 기울여 보았다.
“이건 좀 무거운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원이 응답했다.
“이쪽 게 좀 더 가볍죠. 내구성도 있으면서 가볍고 또 보온성도 좋고요. 이게 요번에 새로 나온 신상품이에요. 디자인도 이국적이어서 인기가 좋아요.”
“모로코풍이군.”
“어머, 아시네요? 본차이나에 조예가 깊으신가봐요. 호호호.”
“디자인은 에르메스가 낫고 색감은 앤슬 리가 더 마음에 드는데. 포슬린은 너무 고풍스럽고....”
“아저씨.”
“헉!”
어느새 소리 없이 끼어든 은찬은 펄쩍 뛰는 한결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야, 깜짝 놀랬잖아!”
“아저씨, 저거 가격표 봤어요? 1만2천 원인 줄 알았죠? 어후, 무슨 커피 잔이.... 놀라지 마세요. 아저씨. 저거 12만원.”
은찬은 손가락 하나와 둘을 펼쳐 보이며 한껏 죽은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십!이!”
“스푼은 골랐냐?”
“네? 아, 아뇨”
“어후, 내가 널 왜 데리고 왔을까? 응!”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스푼가 포크, 접시 유리컵 같을걸 척척 골랐다. 아무래도 그릇을 여자보다 더 좋아하나 보다. 은찬은 그가 손가락으로 뭘 찍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잘 안 돌아가는 머리로 얼른 계산해 봐도 엄청난 액수가 튀어나오니까 말이다. 나중에는 너무 무서워서 계산하는 것마저 포기해 버렸다. 은찬은 카운터 앞에서 신용 카드를 챙겨 넣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때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려고 한 말이 절로 툭 튀어나와 버렸다.
“아저씨”
“이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지. 자식아. 좀 낯간지럽지만.”
“사장님 아저씨.”
“아저씬 빼고.”
“사장님.”
“왜?”
“돈이 그렇게 많아요?”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오예, 밥!
은찬은 그보다 앞서 후닥닥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지하 주차장 버트을 누르고 문이 닫힐 찰나 한 커플이 탔다. 평일 대낮에 여유롭게 그릇 가게를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게 놀라웠다. 그것도 이렇게 젊은 남녀가. 백수인가? 참, 이 아저씨도 얼마 전까지 백수였지? 어쩌다 커피집을 하겠단 마음을 다 먹었을까? 그 호텔도 그렇고, 커피잔에 돈 쓰는 걸 봐도 그렇고, 집에 돈은 좀 있나 보네. 변두리 상가에서 커피 장사를 하려는 걸 보면 큰 부자는 아닌 것 같고, 졸부집 막내아들쯤 되겠군.
“자기,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갑자기 여자가 앵돌아진 표정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조용히 해.”
“뭘 조용히 해? 엄마가 사도 괜찮다고 했단 말이야. 근데 왜 못 사게 하는데? 내가 예쁜 그릇에 밥해주면 자기도 좋잖아.”
“나중에 얘기하자.”
“아니 자기가 돈 내는 것도 아니고, 내 카드로 긁을 건데. 그리고 지금 아니면 저런 명품 그릇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르고....”
“에이씨! 입 안 다물어!”
헉!
벨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여자는 눈과 얼굴이 새빨게져서 완전 굳어 있었다. 남자가 손목을 잡아 홱 끌었다.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은찬은 숨도 크게 못 쉬었다. 그들을 지나쳐 주차딘 차로 걸어가는데 계속 신경이 쓰였다. 여자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놔! 끝이야! 다 끝이야!”
은찬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서 한결이 차로 갔다. 남의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한결은 이미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때 쿵쿵거리며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찬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와서 퍽 받았다.
“아!”
은찬은 충격을 받긴 했지만 비틀하는 정도였다. 단련된 몸이라 위급 시에는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는 편이다. 보통여자에 비해서 키나 힘에서 우등한 쪽이기도 하다.
“아읏!”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은찬은 놀라서 얼른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어디 다쳤어요?”
아파 낑낑대는 여자를 부축해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벼락 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뭐야!”
“어, 그게...”
“이 새끼가 어딜 만져!”
남자가 들이닥쳤다고 생각한 순간 눈알이 번쩍했다. 태권도 헛배웠는지도 모른다.
“이런, 씨이!:”
은찬은 바닥에 누워 왼쪽 눈을 감쌌다.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머리가 띵 울리고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뭐 하는 거야!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어, 이 목소린! 은찬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 문을 부서져라 닫은 그가 남자에게로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누굴 만졌다고 지랄이야. 이 개새끼가!”
이럴 때야말로 무도인의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은찬은 몸을 휙 날려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저씨!”
다행히도 그의 주먹은 허공에 뿌려졌다.
“이거 안 놔, 새끼야!”
은찬은 소리치며 발광하는 그를 꼭 붙들었다. 그는 흡사 미친개 같았다. 절대 혈통 좋은 개은 아니지 싶다.
“빨리 도망가요! 개 풀기 전에!”
“너 거기 안서! 이 새끼가 사람 염장을 질러놓고 어딜 내빼는 거야!”
“에이씨! 좀 참아. 아저씨!”
눈 아파 죽겠구먼.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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